시간여행이 현실화했다는 걸 느낀 태양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지수를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마냥 좋기도 했다. 지금은 아저씨가 된 대학동기들도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대학교 1학년인 자신의 신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이 해 태양은 학교 체육대회에서 축구경기 우승의 주역이었다. 상념에 빠진 태양을 지수가 불렀다.
"오빠! 왜 그래 오늘? 정신을 어디 두고 온 사람처럼."
"아 그, 저, 시골의 부모님 생각나서 그래."
태양의 아빠는 경기북부 한 시골마을에서 횟집을 운영한다. 횟집에서 번 돈으로 태양의 학비를 조달하고 있다. 지수의 엄마는 부천에서 호프집을 운영하고, 여기서 번 돈으로 지수가 자랐다. 태양의 엄마와 지수의 아빠는 재혼했다. 태양의 엄마는 매달 생활비를 주고 아들을 살뜰하게 챙기지만 지수의 아빠는 소식이 잦지 않다. 멍하니 앉은 태양을 동걸이 불렀다.
"형, 무슨 생각해요? 한 잔해요."
"어… 그래, 한 잔 해야지."
동걸은 태양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서 가장 먼저 채용한 직원이다. 지금은 태양과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변호사 뺨치는 실력을 갖고 있다. 옆 자리에 앉은 민훈이는 5년 전 태양의 사무실에 합류했다. 대학 졸업 후 두부 사업을 하다 망하고 태양을 찾아왔다.
태양은 술을 마시다 말고 지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얼마나 흐뭇한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태양의 평소 꿈이 이뤄진 것. 현실에서 벗어나 대학시절로 돌아오고 싶었다. 앞으로 군대도 가야 하고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시험도 봐야 하지만, 지수 곁에 다시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
갑자기 태양의 몸에 엄청난 엔돌핀이 돌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범벅인 상태에서 차가운 물로 샤워할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느껴졌다. 술도 무한정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태양은 자신을 너무 과신한 바람에… 뻗었다. 동걸과 민훈이가 태양을 부축하고 어르고 달래 그의 집에 눕혔다.
"형! 우리 가요, 내일 지수가 일어나자마자 전화하래요. 아마 엄청 혼날 거예요!"
다음날 저녁.
지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언니를 만나러 나갔다. 그때 발걸음을 재촉하는 태양을 발견했다. 조금 전 지수와 통화한 태양은 일찍 자야겠다고 했다. 지수는 태양이 의심스러웠다. 언니에게 못 간다고 전화를 건 뒤 지수는 태양의 뒤를 밟았다.
태양은 지수네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태양은 지수의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양은 한 호프집 문을 열었고 잠시 뒤 한 여자 앞에 앉았다. 지수는 밖에서 그 상황을 보고 태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양의 휴대전화에 ‘gs’라고 떴지만 받지 않았다. ‘gs’는 지수의 애칭이다.
지수는 태양과 함께 있는 여자를 유심히 봤다. 긴 생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무엇보다 육감적이었다.
‘미쳤어 정말. 바람난 게 확실해.’
언니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들어온 지수. 그녀의 표정을 본 언니가 묻는다.
"너 태양이랑 싸웠어? 표정이 왜 그래?"
"언니, 싸운 정도가 아니라 망했어!"
"왜? 뭔데 뭔데?"
지수는 조금 전 상황을 언니에게 모두 말했다. 그 여자 외모까지도. 언니는 지수의 생각에 공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딱 봐도 눈빛이 여자 한 둘이 아니게 생겼어."
"언니, 그건 아니야. 눈빛이 깊은 거지, 그런 건 아니야."
"이거 봐, 너 아직도 걔를 감싸고도냐? 제정신이 아니다."
지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편의점에서 김밥을 들고나갔다.
"야, 그거 폐기 아니야. 돈 내고 가!"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태양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문자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지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