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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Jul 12. 2024

미래의 문장

VOL.18 / 2024. 7월호. 시로 쓴 이야기_9

미래의 문장     



 우산으로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우산은 내리는 비로부터 우산을 쥔 사람을 완전하게 보호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산은... 필요하다. 칠월의 오늘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많은 빗속에서는 반드시.   

 ‘집 나오니 갑자기 비 쏟아지네. 우산 꼭 챙겨.’

 이모티콘 하나 없이 승우를 염려하는 소연의 카톡 메시지가 전송된 것은 30분 전이었다. 승우는 그것으로부터 두 가지를 추측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메시지에 늘 이모티콘을 빠뜨리지 않던 소연의 지금 기분이 별로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우가 비를 맞을까 봐 걱정하는 소연이 평소와 다르게 서둘러 약속장소로 출발했다는 것.  

 승우는 카페에 미리 나와 있는 소연의 표정이 다소 어둡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늘 십여 분 일찍 나온 승우가 약속 장소에서 소연을 기다렸다. 소연의 메시지를 받기 전 여유 있게 집을 나서려 할 때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예상한 승우였다. 승우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 소연은 보통은 딱 제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나타나곤 했다. 그런 소연이 오늘은 무려 이십 분 가까이 카페에 미리 나와 홀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것이다. 함께 여름휴가 계획을 세워 보려고 만난 오늘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승우는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받았다.

 - 일찍 나왔네. 무슨 일 있어?

 - 일은 무슨 일. 그냥 일찍 준비가 돼서 미리 왔어.

 애교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소연의 평소 음성이 아니었다.

 - 근데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목소리도 가라앉고. 진짜 뭔 일 있는 거 같은데.

 - 아니야. 먼저 커피 시켰으니까, 자기도 마실 거 시켜.

 한낮의 소나기 속 칠월의 높은 습도는 떨어질 줄 몰랐다. 승우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도 뭔가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연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은데. 계속 아무 일도 없다고 둘러대며 소연은 속 시원히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승우도 계속 캐낼 생각은 없었다. 몇몇 주변 사람들의 휴가 계획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승우는 얼마 전 지역 문예지에 실린 자신의 에세이를 언급했다.

 - 소연아, 서해문학 여름호에 실린 내 에세이 읽어봤어?

 - 에세이? 읽었어. 며칠 전에 나한테도 한 권 줬잖아.

  소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승우는 놓치지 않았다. 읽었다고? 그 글이 뭔가 소연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일까.

 - 평소에 계속했던 생각을 적었다기보다, 잠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고독에 관해 쓴 글이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 ……

 한참 커피잔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소연이 문득 고개를 들어 승우의 눈을 또렷이 쳐다봤다.

 - 왜?

 - 자기는 내가 옆에 있어도 삶의 의미가 없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그 에세이에 그렇게 썼잖아. 삶의 의미가 없을 때가 있다며.

 - 에세이에 실린 문장들? 에이, 그건 그냥 글이잖아.

 - 그냥 글이라니. 시나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야말로 작가의 솔직한 그대로의 얘기잖아. 외롭다며? 삶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며?

 -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마음이 좀 심란할 때 쓴 글일 뿐이야. 에세이 청탁이 왔고, 마침 써놓은 글을 보낸 것뿐이었고. 그리고 살다 보면 옆에 누가 있더라도 그런 마음 들 때 있잖아. 매일 그렇다는 게 아니고, 어쩌다 가끔씩 그럴 때도 있다는 거지.

 - 그러니까 자기는 내가 있어도 가끔씩은 외롭고, 삶의 의미도 없다는 말이네.

 승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둘의 대화가 더 어긋난다고 느꼈다. 이럴 때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건 큰 싸움으로 번질 뿐이다. 승우는 소연의 입장에서 자신이 쓴 그런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지 생각해 봤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소연아. 만약에 네가 그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면 나도 역시 마음이 많이 안 좋을 것 같아. 미안해. 내가 너무 경솔한 글을 잡지에 실었어. 다시는 그런 글 안 쓰고, 공개하지도 않을게.

 그때, 소연의 눈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소연의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흥분한 듯 톤이 높아졌다.

 - 마음이 많이 안 좋을 것 같다고? 그 정도가 아니야. 내가 이 사람이랑 미래를 함께 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 내가 있어도 이렇게 늘, 아니 그래 가끔씩이라고 하자. 그렇게 마음의 고독에 예민한 사람이랑 내가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수 있을까? 곁에 살면서도 때때로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과? 그걸 옆에서 보면 마음이 어떨 것 같아?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나중에 같이 살 때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난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승우는 마음이 쿵 내려앉음을 느꼈다. 카페 창밖으로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금세 그칠 소나기가 아닌 듯싶었다. 고개를 들어 소연의 붉어진 눈을 바라봤다. 한없이 슬픈 눈이었다. 승우는 자신의 글을 떠올려보고, 맞은편 소연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깨달았다. 이승우, 너는 여전히 청춘의 허세를 버리지 못했구나. 저 슬퍼하는 소연의 내면을 봐라. 그녀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것이냐. 서로 사랑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원하는 거냐, 아니면 여전히 고독한 이미지를 한껏 연출하며 위선 가득한 가짜 예술가를 꿈꾸는 것이냐.    

 -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아무런 의미가 없냐니? 절대 아니야. 나 너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미안해. 진짜 내가 잘못했어.

 승우는 진심으로 소연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깨달은 자신의 위선적인 어둠과 사랑에 관한 이기적인 태도를 그대로 고백했고 또 반성한다고 말했다.

 - 미안해. 미안해.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그런 글이 공개적인 문학잡지에서 사람들에게 읽힐 때, 소연이 네가 받을 상처와 어둠을 생각해보지 못했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고, 글로써 멋을 부리려고만 한 것 같아. 완전히 잘못 생각했고 큰 잘못을 저질렀어. 정말 정말 미안해.

 소연의 눈물이 잦아들고 목소리가 다시 침착해짐을 승우는 서서히 느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소연이었고, 또 그래서인지 승우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마다 넓은 마음으로 그를 잘 받아주던 그녀였다. 그것은 그만큼 또 소연이 승우를 사랑한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고 소나기가 그칠 즈음, 둘은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조금씩 돌아올 수 있었다.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소연이 다시 웃을 수 있도록 승우는 애썼다. 그리고 원래 오늘 의논하려고 한 여름휴가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소연과의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승우는 자신의 문장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글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뒤를 향해, 어두컴컴했던 지난날들을 향해 돌아서 있는 것은 아닌지. 과거의 일이나 감정을 잠시 쓸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대로 그것에 취하거나 머물러 있으면 안 되리라. 자신의 가장 첫 번째 독자인 소연에게조차 마음의 작은 위로나 행복감을 주지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쓴다는 것인지.

 승우는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문장을 떠올렸다. 쓰면서 그 문장의 이야기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앞으로를 위한 글들을. 소연뿐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들에게 어둡거나 슬픔 감정을 주는 글이 아닌, 스쳐간 과거와 옛 골목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도를 그려나가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불순하게 남아 있는 위선과 허세, 이기적인 욕망과 어둠을 비워야 했다. 먼지들을 털어내야 했다. 아주 완전히 깨끗해질 순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천히 닦아낸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문장들을 쓸 수는 있다.

 승우는 집으로 돌아와 이미 문예지에 보냈지만 소연에게 상처를 준 그 에세이를 컴퓨터 파일 목록에서 영구히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한글파일의 새 문서 창을 열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새하얀 모니터 위의 첫 줄 첫 칸. 커서가 깜박였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게 아니라, 이전에의 풍경을 깨끗이 덮은 하얀 설원 위에 다시 발자국을 찍는 것이리.

 이 무더위와 습도, 처음 태어난 나의 계절. 칠월은 지나가리라. 그 계절의 풍경 위에 다른 계절의 풍경이 내려앉듯이, 그래, 계절은 늘 미래를 향해 간다. 지난해의 여름이 올해의 여름이 아니듯이. 올해의 가을이 내년의 가을과 다르듯이. 그런 문장의 길. 승우는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여행의 밤*



 잠들기 전 어둠

 아주 잠깐의 틈을 부러 만들었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번째 읽는 문장처럼


 눈소리를 듣기 위해

 아주 천천히 눈밭을 걷듯이


 멀리서 흐느끼는 파도를 들으려

 갑자기 내 모든 말을

 멈춰야 하듯이


 차갑고 맑은 물을

 두 손을 모아 떠 마셨다

 지저분해진 장갑을 벗고서


 여행의 밤

 내가 아닌 당신을 온전히 안기 위해


 나의 어둠이 훌훌

 빈 몸이 되듯이




* 삽입 시,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중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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