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6 / 2026. 1월호. 짧은 소설_13
그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수시 추가합격자 발표 및 등록 마감일이 다가옴에도 여전히 학급엔 단 한 군데 대학에도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고, 그렇게 깨고 나면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와 쉽사리 다시 잠들지 못했다. 고3 담임을 맡은 지 사 년째. 매년 이맘 때면 반복되는 마음의 소요였다.
'붙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내년이 있잖아. 겨우 일 년 늦게 대학에 간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진 않아.'
'넌 이미 꿈을 이룬 기성 세대니까 그리 쉽게 생각하는 거지. 애들 마음을 네가 알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생각들이 좁은 마음 안을 오가며 다퉜다.
며칠 후 대학 수시 모집 추가합격자 발표 및 등록 기간이 모두 끝났고, 결국 그의 반에서는 네 명의 학생이 단 한 군데 대학에서도 합격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그중 세 명은 정시 모집에 지원하기에도 수능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재수생이 되는 게 거의 확정적이었다.
'수능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강하게 다그쳐야 했을까.'
'더 보수적으로 수시 원서를 써야 했나.'
'수시 여섯 장 카드 중에서 최소 한두 개는 아예 낮은 하향으로 쓰도록 더 목소리를 낼 걸.'
그는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제 와서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최종 발표가 있고 난 바로 다음날, 대학에 모두 떨어진 학생들에게 그는 그 어떤 말도 건네기 어려웠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둥, 아직 너희에겐 시간이 많다는 둥, 그런 어설픈 위로나 조언은 이미 캄캄해져 길을 잃은 그들 내면에 가닿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담임으로서 아예 모른 척하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그도 몇 번이나 인생의 시험에서 낙방한 적이 있었다. 이십 대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그는 중학교 적 은사에게 편지를 보낸 서른 즈음 기억을 떠올렸다. 끝끝내 인생은 자신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절망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은사가 보내준 답장을 그는 마흔이 지난 현재까지 잘 간직하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그는 책상 서랍 속 편지 상자에 넣어둔 은사의 문장들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선생님은 정민이 네 청춘의 노트가 모든 문장으로 꽉 차 있지 않기를 바란단다. 그 노트가 좌절과 원망의 문장들뿐 아니라, 무조건적인 긍정과 인내의 문장으로 가득 찰 까닭은 없어. 모든 것들로 꽉 찬 노트는 그 자체로 편히 숨 쉴 수 없을 테니까. 바깥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조금만 비워보도록 해봐. 마음 노트의 마지막 두세 줄만큼은 부러 남겨두는 청춘, 스스로든 사랑하는 이든 언제나 누울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와 같이 문이 열려 있는 삶. 정민이의 마음 노트가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늘 그렇게 여백이 있었으면 좋겠어.'
마음 노트의 여백. 그 비어있는 두세 줄. 그건 마치 언제나 채워질 수 있는 미래의 문장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거나, 잔잔해진 수평선을 마주한 항구의 고요함 같았다. 그는 은사의 편지를 읽다가 이런 문장들을 떠올렸다.
'아직 그렇게 우릴 기다리는 비어진 마음들이 있으니까. 가능성과 시간, 기쁨 혹은 눈물, 따스한 볕과 바람, 앞으로 찍힐 다정한 발자국 같은 것.'
그는 은사의 편지 속 문장을 컴퓨터 문서창에 옮겨 썼다. 그 문장들을 인쇄해 자신의 학급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고 자신의 말도 몇 마디 덧붙이고 싶었다.
다만 화면창의 모든 공간을 채우진 않았다. 답답해 보이는 문단은 부러 몇 마디를 다시 지웠다. 비웠다. 시리지만 상쾌한 겨울 공기가 들어올 것만 같은, 흰 눈이 천천히 쌓여갈 것만 같은 텅 빈 공간. 그런 미래의 풍경을 마음 노트 한구석에 남겨 두고 싶었으니까.
(끝)
허민 –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 시를, 2024년 계간 『황해문화』 창작공모제를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