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먹지? 김치찌개? 우동? 너무 배가 고팠다. 한참 늦어진 점심에 머릿속이 여러 메뉴로 가득하다. 빨리 돌아가 일을 마무리하고 늦은 점심을 챙겨 먹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하며 지하철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전광판에 보이는 반가운 글씨 ‘전역 출발.’ 오예. 그렇게 노란색 선을 꾹 밟고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데 어느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한 손엔 종이를 다른 한 손엔 할머니 손을 잡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다가와서 종이를 내밀고 여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셨다. 상황을 보니 분당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2호선 라인에서 방황을 하고 계셨다. ‘분당선’이라고 보이는 노란 표지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노란 표지판 방향을 따라가셔서 지하철을 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노란 표지판 방향으로 움직였다. 전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역 접근 중에 있었고 나는 그들을 계속 지켜봤다. 그들은 내가 가리킨 표지판에 도착해서 다시 멈춰 섰고 지하철은 도착해서 내 눈앞에서 문이 열렸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지하철을 탈까 아님 저분들에게 가볼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분들 생각에 맘이 복잡했다. 잘 찾아가셨는지 궁금했다.
사실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잘 쓰지 않는다. 타인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오히려 오지랖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 그 노부부에게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분들이 계속 맘에 남았던 이유는 그 할아버지 모습에서 나의 아빠를 보았고,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의 엄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은 저 노부부보다 젊으시고 지하철 갈아타기 달인 정도 되는 훌륭한 실력을 보유하고 계시지만 내가 없는 어딘가 다른 이유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실지 모를 부모님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아빠는 핸드폰 업데이트 이후 메시지가 안 보인다고 했다. 전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어 주변에 있는 아무 핸드폰 가게에 가보시라고 했는데, 그 아무 핸드폰 가게의 아무 직원 하나가 “메시지가 왜 안 보여요? 메시지 버튼을 눌러요”라고 전화로 설명한 내가 더 나을 법한 설명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점에 갔다가 기기에 전화번호를 누르는 웨이팅 법이 익숙하지 않아 이리저리 헤맸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복잡한 절차를 빠르게 따라가지 못해 주변 눈치를 보고, 은행에서는 전자서명 중에 작은 동의 버튼을 놓쳐서 긴장을 하신다. 내 나이 마흔이 넘고 나니 부모님에게는 무안하고 마음 상하고 불편해지는 사소한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큰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사소해서 정말 다행이지만 정말 사소해서 더 속상한 기분도 있다. 그 지하철 노부부도 어느 누군가의 부모님이실 거고, 어딘가를 찾아가는데 힘든 하루를 보냈다는 걸 그분들 자녀분들이 알게 되면 가슴이 참 아프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모님을 위해 더 부지런하고 더 세심하게 자주 신경 써보려고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내가 항상 옆에 있을 수는 없기에 모든 걸 해드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내가 없어도 부모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하는 매우 개인적인 생각을 잠시 하다가 2000년도에 개봉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중학생이 된 트레버는 학교 첫날에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실천하라는 숙제를 받는다. 트레버는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데, 자신을 시작으로 세 명의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도움을 받은 세 사람이 다른 세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에게 받은 도움은 천천히 여러 사람에게 퍼져나간다.
이 영화처럼 내가 먼저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작은 도움을 베풀기 시작하면 어떨까.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나의 누군가로 생각하고 따뜻한 오지랖을 보인다면 내가 보낸 따뜻한 마음이 돌고 돌아 여러 사람에게 퍼져 나갈 수 있다면, 나의 부모님 주변에도, 다른 사람들 부모님 주변에도 서로를 도와줄 좋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작은 다짐을 해본다. 오늘부터 하루에 세 번, 타인을 위한 소소한 배려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거다. 사소한 시작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게 바로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