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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Oct 24. 2021

1시간 22분

마지막 수유와 함께 아이를 재우고 나면 본격적인 ‘after 육아’가 시작된다. 하루 종일 방치한 집안일 하기. 먼저 가제 손수건을 모아 세탁기를 돌린다. 손수건을 어찌나 많이 쓰는지 하루가 끝나면 항상 바구니 한가득이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오늘 쓴 젖병을 닦고 이유식을 준비하고 내일 아이가 뒹굴 곳을 쓸고, 가지고 놀 장난감을 닦는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신데렐라 귀가시간이 되고 세탁은 완료된다. 건조기에 손수건을 넣고 동작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시간 1시간 22분. 건조가 되길 기다리는 이 시간이 바로 나의 글쓰기 시간이다. 분유 가루가 날리는 식탁에 앉아 새벽의 적막함 속 또렷해지는 건조기 소리를 벗 삼아 글을 쓴다.    


결혼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남편에게 ‘10년만 글 쓸 시간을 줘 그럼 너의 말년을 책임져줄게’라고 말했다. 입을 꿰맸어야 했다. 암튼 알 수 없는 희망에 그렇게 남편에게 이 세상 가장 어려운 약속을 잘도 내뱉어 버렸다. 이런 약속이라도 해둬야 글을 더 열심히 쓸까 싶어 더 과장스럽게 약속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허풍스럽고 듣는 순간 콧웃음 나게 해도 내 마음 한 구석에선 정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다.  


결혼 전, 내 사랑 찾기가 간절해 자의든 타의든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소개팅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짝이 아닌 사람을 만나고 올 때면 (매번 그랬지만) 집에 오는 길이 그리 씁쓸하고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때 적어둔 글들이 모티브가 되어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작은 드라마가 되었다. 비록 내가 쓴 문장들이 다른 대사로 대체되고 남은 건 몇 개의 에피소드와 캐릭터 이름 그리고 풍기는 느낌뿐이었지만 내 별명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스토리를 입히는 건 참으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그때 이를 제작하던 사람들은 문장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한 나를 ‘작가’라고 불러줬는데, 나는 그 이름이 너무 설레고 좋았다. 분명 ‘작가’라고 불리기엔 쓴 문장이 없었지만 그 이름이 너무 달았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 않게 그 이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품게 된 것이 말이다. 


출산과 육아에 치여 글을 쓸, 글쓰기를 공부할 여유가 없다 보니 품었던 생각이 희미해진다. 심지어 어떤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운좋았던 작가 놀이 경험 때문에 가능성에 매료되어 작가를 꿈꾸는 것이면 어떡하지란 생각까지 더해져 나를 더 고단하게 만든다. 내 이야기를 쓰는 걸 넘어서 다른 이야기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실력에 뭔가 쓰기도 전에 나를 의심하게 만든다. 내가 결국 쓰지 못할 사람이라면 지금 이 새벽에 졸음을 참아가며 식탁 앞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잠 귀신까지 와서 내 눈꺼풀을 누르며 그냥 자라고 속삭인다.  


근데 이리저리 고민하기엔 글쓰기가 좋다. 내 머릿속 생각들을 글로 표현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내가 고민해서 쓴 문장을 읽어주고 내 이야기를 공감해준다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래서 잠이 고픈 고단함에도 식탁에 쪼그려 앉아 글을 쓴다. 비록 1시간 22분 후에는 건조된 가제 손수건을 걷어 개어 넣어두고 내일 육아를 위해 토막잠을 청해야 하지만 이 시간이 10년 정도 쌓이면 진짜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럽지 않게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건조 완료 알림음이 울린다. 신데렐라가 마법에서 풀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듯, 쓰던 글을 멈추고 내 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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