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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Oct 22. 2021

판도라의 상자

컴퓨터 화면 가득 펼쳐진 썸네일 속에서 느낌이 묘한 사진 몇 장이 눈에 꽂힌다. 썸네일이라 실루엣만 보이지만 남녀의 다정한 사진인건 알 수 있었다. 마우스를  그 사진 위로 가져가 클릭하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렸다. “이건 판도라의 상자야!”  


나만큼 철두철미한 남편은 과거 흔적을 남긴 적이 없다. 흔한 SNS도 안해서 아무리 구글을 뒤져본들 어떤 게시물도 찾기 어려운 사람이다. 우리가 친구였을 땐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연인이 된 후에는 몇 번의 유도신문에도 지난 일 이야기는 잘 피해 갔다. 궁금은 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운명이 갈라놓아 서로 애달프게 그리워하지 않는 한, 과거였다. 나도 지나간 사람들이 있기에, 질문받는 건 싫기에 지나간 이야기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의 판도라 상자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우린 남편이 쓰던 노트북을 공용 컴퓨터로 정했고 계속해서 같이 썼다. 어느 날 남편은 바탕화면이 파일들로 가득 차기 바로 직전 마침내 컴퓨터 정리라는 것을 했고 내 파일들을 어딘가에 짱박아뒀다. 그렇게 파일들을 뒤지던 중 찾으려던 것은 못 찾고 판도라 상자를 찾은 것이다. 클릭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궁금한 건 절대 못 참아 드라마도 마지막회부터 보는 사람이라 결국 상자를 열고 말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다음 사진을 클릭, 클릭, 클릭. 말로 ‘남편에게도 당연히 과거가 있지, 알지’ 하는 거랑 실제로 사진을 보고 어떻게 생긴 사람과 어딜 가고, 뭘 했는지 눈으로 보는 건 정말 달랐다. 있겠지 했던 일이 사실이 되는 순간 심박수는 올라간다. 관심 없었던 과거에 뒤늦은 질투가 활활 타오르는 거 보니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거 맞는구나 하고 긍정 회로를 돌려봐도 자꾸만 그의 과거에 한껏 비뚤어진 심술보가 터져 나왔다. '들어오기만 해 봐라.' 화가 나다가도 나보다 이쁜가, 키는 큰가, 몸매는 어떤가, 이렇게 상대방을 유심히 뜯어보다 아이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어보는 게 맞을까? 아님 닫아두는 게 맞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죽음과 병을 포함한 온갖 재앙이 튀어나온다면 열지 않는 게 좋겠지만 지나간 여자 사진쯤은 열어봐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이미 열어버린 상자를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해야 했다. 처음부터 상자를 열지 않았음 되었겠지만 이미 클릭을 했으니 내가 본 사실을 알릴지 말지 결정을 해야 했다. 안 본 척, 쿨한 척, 컴퓨터 속 판도라를 덮을 것인가 아님 봤다면서 화를 낼 것인가. 그래 모른 척 하자. 여기까지가 남편 퇴근 전까지의 결정이었다. 내가 안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저녁을 먹고 아이 목욕을 시키고 평범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결국엔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편 앞에서 입이 간지러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난 네 컴퓨터를 뒤진 사람이 되었어' 대한 억울함을 감추기 위한 웃음이었을 수도 있고 쿨 해 보이고 싶었던 마음에 한껏 꾸민 웃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웃음을 터트리니 꽁했던 마음이 진짜 풀려버렸다. 그리고 당황한 남편에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질투가 났었다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기분이 이상했다고. 그리고 너 되게 촌스러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 판도라의 상자는 같이 공유한 그의 과거의 한 조각이 되었다. 암튼, 육아만 하던 잔잔한 오늘이 조금은 재미있었다. 


PS 다음 날 보니 남편은 옛 사진들을 다 지워놓았다. 쓰레기통에 고이 버려두었다. 나 같았으면 shift+del로 지웠겠구만. 덕분에 또 봤다. 다시 봐도 촌스.. 암튼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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