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언덕에서 맞는 아침
아무것도 아니던 장소가 어느샌가 특별한 장소가 되고
특별하던 장소가 어느샌가 아무것도 아닌 장소가 되어버린다
어쩌면 누군가를, 어딘가를 어떠하다고 단정 짓는다는 건 섣부른 일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섣부르게 단정 지어 버리곤 한다.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아주 사소한 일들 일지 몰라도, 그 일상 속에서 우리의 뇌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읽어들이고, 그 짧은 찰나에 멋대로 판단해 버리곤 한다. 첫 만남에 지각을 하다니 이 사람은 분명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임이 분명해, 멀리해야겠다라던지, 이 카페는 커피가 맛있네 내 단골가게로 삼아야겠어 라던지. 그 사람은 원래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지만,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피치 못하게 늦게 된 사람일지도 모르고, 단 한잔의 커피를 믿고 단골가게 삼을 뻔했던 카페는 그 다음날 바리스타가 바뀌어서 커피맛이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다.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인지. 하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찬찬히, 두 눈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일상을 담기 위해서.
왜 갑자기 뜬금없는 초콜릿 사진이냐고? 단정 짓지 말자. 아침으로 시리얼도, 토스트도 아닌 초콜릿을 먹는 직장인 두 마리도 있다. 사실 전날 밤 먹고 싶었지만 10km 행군에 피곤해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어서 잤다. #마이쪙, 프랑스 가면 꼭 사드세요 선물용 말고 꼭 사서 먹어요 #꿀맛 #넘나맛있는거 #메종드쇼콜라
파리 둘째 날 우리가 행선지로 정한 곳은, 몽마르트! 이름으로만 듣던 악명 높은 몽마르트! 흑형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여자 손목에 팔찌를 채워준다는 무시무시한 곳. 파리 숙소를 잡으려고 이곳저곳 검색을 해봤는데 집들이 예뻐 별생각 없이 몽마르트 쪽을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치안이 안 좋다는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의 한 줄에 바로 패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을 갈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내 멋대로 몽마르트를 단정 지어버리고 말았다. 몽마(夢魔), 같은 발음이라 그런지 나의 상상 속의 몽마르트르는 그냥 왠지 어둡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담은 몽마르트는 황홀했다. 고즈넉한 언덕 위에 위치한 성당과 파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풍경. 계단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경치를 감상하는 사람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파리의 공원들은 하나 같이 나에게 좋은 기억을 선사해준다.
파리 시내의 북쪽, 가장 높은 지대. 언덕에 위치한 몽마르트는 1860년에나 제 18 구로 파리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산(Mons Martium)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몽마르트(Montmartre)는 전설에 따르면 파리 초대 교주인 드니 성인이 기독교 박해를 받고 머리를 잘렸는데도 죽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주워 들더니 북쪽에 있는 지금의 생드니 성당까지 걸어가 묻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몽마르트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순교자들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고 한다. 222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파리 전경은 사진이 다 담아내질 못한다. 그러니 사진에 담을 수 없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말고, 파노라마샷과 셀카를 찍었다면 잠시 사진기는 목에 걸어 누가 채가지 않도록 간직하고, 두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당신의 가슴에 그 풍경을 담기를. 몽마르트, 넌 좀 감동이었어.
몽마르트를 올라갈 때, 밑에 있는 크레페 가게나 바게트 가게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사서 올라가면, 계단에 앉아 경치를 천천히 만끽하며 식사할 수 있어요! 와인 한 병 필수! 이 경치라면 각 1병도 가능할 듯
때마침 우리가 갔던 날은 일요일이라 몽마르트 역 근처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우리는 공동품을 구경하면서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 시작했다. 직장인 두 마리의 현실적인 파리 여행기, 직장에서는 빠릿빠릿 일하는 우리지만 휴가에 나오면 그 누구보다도 게을러진다. 그날 가는 곳은 그날 아침에 생각하자라던가, 일단 몽마르트 갔다가 어디갈지 생각하자라던가? 그렇게 게으른 우리가 유유자적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은? 그렇게 지도를 둘러보던 차에 우리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마레지구(Marais)였다. 트렌디한 바와 부띠끄 샵이 가득하다는 책자의 짧은 설명에 그렇게 우리의 행선지는 정해졌다.
@ Place de la Bastille, Rue Saint-Antoine
이 역에서 내리는 거라고 해서 내리긴 내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
트렌디한 바가 많다며! 감각적인 셀렉트 샵과 브랜드 샵들도 많다며! 아무도 없는데 이게 뭐야? 일요일이라 장사를 안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심장이 덜컹했다. 하지만 아니다 판단하기에는 아직 섣불렀다, 마레지구도 천천히 걸어야, 골목길 구석구석 자세히 보아야 앙증맞은 가게들과 브랜드 샵들이 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모여서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제는 눈치게임 시작이다! 사람들이 각자 손에 들고 돌아다니는 기다란 에끌레르에 시선 한 번, 양손 가득 속이 꽉 차 보이는 팔라펠에 시선 두 번, 예쁜 꽃 모양으로 담긴 젤라토에 시선 세 번. 사회생활 2년 차 직장인 두 마리는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사람들이 어디서 사 오는 건지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눈치는 이런 때 쓰라고 우리가 그렇게 회사 생활 열심히 한 건가 싶기도 하다. 넉살 좋은 Excuse me 날려가며 인상 좋은 백인 아저씨에게 어디서 사는 거냐고 물으며, 우리에게도 알려주세요 하는 한국 여행객들의 초롱초롱 눈초리에 보답하며.
L'eclair de Genie, 14 Rue Pavee
L'As du Fallafel, 34 Rue des Rosiers
Amorino, 1 Rue des Francs Bourgeois
돈 아낀다고 나눠먹지 말고, 1인 1 에끌레르, 1인 1 팔라펠, 1인 1 젤라또 하자, 싸움 난다
눈으로 마음으로 담은 몽마르트 언덕, 가게들과 숨바꼭질하는 것만 같았던 마레지구. 게으른 일요일을 원했던 우리에게는 정말 완벽한 루트가 아니었나 싶다. 찬찬히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자세히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발길 닿는 대로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몽마르트와 마레지구를 둘러보는 나른한 일요일 하루를 추천해 드립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이 저녁시간이다 보니, 갑자기 팔라펠이 먹고 싶다, 오늘 저녁은 너로 정했다!
와인과 함께했던 저녁식사 단돈 10유로로 장보고 요리한 파스타, Airbnb라서 가능했던 작은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