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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Oct 24. 2022

잔상

잔상

"언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내가 내린 단정 뒤에 그녀는 짧은 호흡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한참 뒤 낮은 음조의 대답이 이어졌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녀는 가을에 내리는 눈이라며 빨간 지붕위에서 흩날리는 눈을 찍어 보내주거나 분홍색 호수를 보내주거나 마법사가 살 것만 같은 곳 위에 뜬 달을 보내어왔다. 어쩌면 죽음을 작정하고 떠났을지도 모를 삶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정반대의 시간에 그 먼 곳에 있었던 그녀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만났다. 그래서 그 모습을 또렷이 볼 수가 없었다. 윤곽 밖으로 새어나오는 희멀건 분무의 형태만을 간직 했다. 그리고 나에겐 그 잔상만이 그녀였다.

뿌연 눈으로 살아 온지 오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굳이 보려고 얼굴을 찌푸릴 일도 없었다. 사방은 늘 익숙한 것들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도록 일해 온 직장과 매일 가는 카페와 아침마다 들르는 샐러드 가게처럼 익숙한 것들만이 자리하도록 했다. 희미한 모양만 갖추고 있어도 대번에 그것과 그곳과 그와 그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이 더듬어 찾지 아니하여도 괜찮을, 사물과 사람과 공간은 내가 빚어 만든 상(像)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해온 지난날의 경험이 만들어 놓은 잔상은 수집 된 기억의 파편을 수북이 쌓아서 익숙함 속에 가려져 있었다. 하여 나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들을 어릿어릿 가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날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두고 본지가 오래 된 관계일수록 그 모습 그대로 고결되어 버린다. 후에 헤어지고 그가 찾아와 그 때 그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고 세상없이 우겨보아도 하등 소용없다. 헤어짐의 대상이 나 자신이라면 문제는 더 절박해진다. 지워지지 않는 모습이 나라는 존재라면, 우길 수조차 없을 테니깐. 미워하고 아무리 미워하며 짓이겨도 손댈 수가 없다. 그렇다하여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본인 시력이 많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죠?"

근래 들어 부쩍 나빠진 눈을 탓하며 더는 안 될 성싶어 안경원을 찾았다. 시력검사를 마치고 나서 안경사는 내게 물음 비슷한 추궁을 해왔다.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네."라고 작게 대답했다. 사람이 얼마나 멀리 내다 볼 수 있는지를 숫자로 말하는 것 자체가 어설프게 느껴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마음  속으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는 내 존재의 시력, 눈의 능력을 명료화된 숫자로 일러주었다. 한 낫 인간이 내다볼 수 있는 영역은 어긋남 없이 제한된 테투리 안 이었다.

“평상시에 안경이나 렌즈 착용하시죠?”

“아니요.”

“그냥 계시면 계속 나빠지는 건 알고 계시죠?”

이 안경사의 화법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묻는 물음이었는데 마치 정해진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답을 정해놓고 묻는 이가 점점 더 많아지려나.'

안경사는 눈빛으로 나를 채근하였다. 모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네."라고 답하였다. '안경과 렌즈로 시력이 돌아 올 수 있었다면 나는 진즉 그랬을 거예요.’ 바깥으로 내뱉어 봤자 처음 만난 이에게 괜한 핀잔을 들을까 하여 침묵했다. 내게 그런 행태들은 회귀가 아닌 종착지로 가는 길의 지연을 의미 할 뿐이었다.

"어때요? 이건 괜찮나요? 이러면 잘 보이나요?”를 반복적으로 물어본 후, 그는 나에게 알맞은 도수의 렌즈를 건넸다. 한 쪽씩 끼워보고 꾸벅 인사를 하고 그 곳을 나오려는데, 환하다 못해 너무나 뚜렷해져 바깥을 두르고 있던 선들이 사라진 세상은 나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익숙하여 놓아둔 것이라고 믿었던 세상이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안경원을 나와 길을 걸으며 그녀의 말을 따라 낮게 읖조렸다. 그녀에 대해 꽤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을 머릿속으로 그려 똑똑히 바라 볼 수 있었다. 희멀건 안개 형태의 잔상을 거두어 드리고 마주대하여 바라보니 그때엔 미처 볼 수 없었던 명확한 것이 하나 보였다. 그 낮은 목소리를 들었어도, 우리 지난날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그 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같지 않다는 것.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방황하는 삶을 살았는데 너는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확정 지었어. 그것도 단 몇 분 만에."

나에게 잔상이란 두려움 그 자체였으니깐. 그 대상을 이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깐. 그러므로 당신의 모습 또한 그대로여야 했다. 그러나 그 후로 당신은 거기에서 벗어나려 삶의 울화를 목젖 뒤로 여러 번 삼켰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제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간신히 나열할 정도가 되었어. 너를 밉다 하는 게 아니야.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랬어. 하지만 적어도 그 때와 나는 같진 않아."

“뭐가 달라졌는데?” 걸으며 나는 혼잣말을 뱉었다. 묻고 싶었으나 답을 듣고 싶진 않았다. 답이 정해진 물음이어서. 바꾸려고 수백 번 애를 썼던 지나온 시절의 모습들을 또렷하게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풋내기가 되어버렸는데, 언니는 그 때와 같진 않다고 확언했다. 내게 있어 과거란 멀건 테투리 안에 가두어 둔 세계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주하고 이제 그 경계를 거둬내어 두 눈으로 총총히 바라보는데서 부터 모든 여정을 시작했다고 말하였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며 나에게 그 길을 걸어보라는 권유의 말과 함께.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 선택이라는 말도.

경계를 거두고 본 세상은 익숙함이 아닌 두려운 것이었고 나는 손을 떨고 밤잠을 헤치며 때로는 비명을 지르는 어둔 날들도 보내야했다. 이기로 가득 찬 지난날의 모습을 마주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지워지지 아니하는 잔상을 바로보기 위하여 둔탁해진 동공위에 투명한 렌즈 까지 덧대어 모든 신경들을 자극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주한 지난 내 모습과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면 약해 빠지고 호졸근한 모습의 앙상한 내 자신을 품에 안아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르고 하는 사과는 정녕이 그 사과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라앉은 화를 다시 불붙게 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진실하여 그런 것이야 상관이 없었다.

지난날의 지워지지 않는 내 모습이 권태롭고 애처롭고 부끄럽기도 하며 끌어안아 저어 깊은 어딘가로, 떠오르지 않을 깊은 저 심해로 가라앉고 싶다 하여도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지나고 한 번도 바라봐 주지 않았을 그 흐릿한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호기롭게 안아주었다. 다정히 입 맞추며 바다의 곁에 바람의 냄새에 함께 얼굴을 묻어 그 또한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맞아 주었다.  

 잔상과 함께 바라본 뚜렷한 세상이 그리 나쁠 것만도 없다. 카페 주인의 눈매는 선하여 그 기품이 더하였고, 상처인 줄 알았던 샐러드 가게 아르바이트생의 오른쪽 입가의 보조개가 싱그러웠다. 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 펼쳐지는 계절의 질감은 보드라웠으니, 이만하면 원래 그 모양이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도 그리 나쁜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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