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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Oct 22. 2022

시월



손끝으로 달력의 열두 장을 세어가다가 '시월'이라는 이름이 좋아 뱉어보았다. 격정을 지나온 계절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운 듯하다. 8월이 지나 만나게 된 계절의 촉감은 되뇌려 애쓰지 않으면 스산히 사라지게 될 정도로 별것이 없는 것만도 같다. 진하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으며 흩으면 그 모양대로 새겨질 계절에, 신은 이 계절에 나를 놓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십일월과 십이월을 발음하기 전에, 입술의 모양을 조금 여리게 하여 여름이 지났으니 이제 힘을 좀 빼내라고 말하듯이. 그렇게 잠시 지나치는 시간에 나는 일었다. 격정과 격정 사이에 놓여 쉬어 가는 사람. 그리하여 어느 때든 쉬이 잊힐 수 있는 사람으로 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계절의 이름이야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놓인 때와는 전혀 무관한 성정(性情)과 지나온 삶의 자국으로 나의 존재는 쉬어 가기엔 편치 않으며 만나면 잊기 어려운 향을 품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 엄마의 문장이 떠올랐다.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평범하게 살아.'


엄마는 내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내화 주머니에 넣어 둔 편지의 끝머리에는 사람들에게 선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 놓고는 평범한 삶을 살라하였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랐으면서 살아가게 될 그 삶만은 눈에 띄지 않을 보통의 것이기를 바랐다. 어쩌면 딸 가진 여느 어머니들의 희기(希冀)였겠지만, 어린 나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 따위가 되고 싶진 않았고 평범이라는 단어는 무척 진부했다. 그때에도 나는 엄마의 말을 부정하는 것에 성실했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 평범의 한 절이 내 삶에 있다면, 그것은 나의 시월 정도는 아닐까. 이 시간만은 눈에 띄는 것이 없고 소란한 것이 없다. 가령, "생일이 언제예요?"와 같은 물음에, 시월이라고 답하는 것만으로도 덥지 않았고 차지 않음이 내게 그런 의미였다.


내 마음에 누군가가 닿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던 삶에서 쉬이 얻게 된 이름이 하나 있다면, 시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나이가 들수록 그 색이 바래어가는 것이 있다면 태어난 그날이 해마다 돌아오는 것일 텐데, 해를 지나면서도 나는, 나이를 쉬이 먹지 않으려 온갖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생일이 적힌 종이를 어딘가에 감추어 놓은 것처럼 그런 모양을 하기 때문이다. 메신저에 혹여나 알람이라도 떠 올라갈까 감추어 놓고서는 그럼에도 누가 나의 날을 기억하여 줄까를 기다려본다. 그러면 딱, 그 사람들. 이름이 떠오르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내 사람들의 연락으로 안도한다. 다시 그들과 쓸모없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반복되고 바래져가는 시월은 나를 가장 평범한 하루를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고운 이 계절에 평범한 사람으로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을까.'


평범이 쉽지 않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나는 와닿지 않는다. 보통의 삶을 정의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어머니에게는 그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 그리 말하였을까 싶다.


짐작컨대, 엄마가 말한 평범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가을볕에 해를 쬐이고 꽃을 받고 초를 켜고 부서진 쿠키나 맞춤법이 틀린 편지, 밥그릇인지 국그릇인지 모를 그런 보석함 따위의 것을 받은 하루의 날을 사는 것이라면,


해낸것도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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