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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Mar 05. 2022

시간여행

그대의 모습으로 존재하라

시간여행,


바람이 이는 계절이었다. 단풍나무 바로 아래 놀이터가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 않게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가볍지 않을 정도로 불고 있었다.


그 덕분에 단풍이 무수히 떨어졌고 미끄럼틀 위에 켭켭이 그것들을 깔아 이불 삼아 놀았 던 때가 있었다.


그 아이와 어떤 연유에선지 다투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미끄럼틀 끝에 앉아 있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선 다시 두 눈을 뜨면 어른이 되어있길 간절히 바랬던 기억이 침침하게 남아있다.


꾹 감았던 눈을 떠보니 나는 서른 너머의  모습을 하고 있고 다투었던 그 아이가 얼마 전 죽었다는 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소식을 접했을 때, 멍하고 가슴이 묵직하였으나 메어지고 요동치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눈을 감았다 떠서 그 가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는 아마 그저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미끄럼틀 끝에 앉아 화난 모습 그대로 있을 것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마 한참을 그 아이를 쳐다볼 것은 같다.


그리고 아마 그게 다 일 것 같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열 살의 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아직 화가 덜 풀렸다는 시늉을  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아마 나는 그저 그뿐 일 것 같다.


 미래를 알고 현재로 돌아오는 영화를 종종 본다. 또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영화를 보기도 한다. 나는 그런 영화에 쉽게 흥분한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하루살이 아니 어쩌면 더 짧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생인데 훨씬 더 너머의 시간을 내다보고 돌아온다는 내용의 영화라. 모든것들을 다 상상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일까. 소재가 진부하지만 볼 때마다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학창 시절의 애틋함을 품고 있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이십 대의 무모함이 아직 남아있지만 이 역시 지나온 시간의 회귀를 향한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는다.


불혹 이후의 삶이 궁금하지만 막상 누군가 내게 그것들을 전부 다 말해준다 하면 나는 귀를 틀어막고 줄행랑을 칠것이지.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이 된다면, 어떨까. 오십의 나이라는 것이 서글퍼 거기까지 생각코자 아니하노라.


그렇다면 나는, 내게 무엇을 바꿀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단 하루의 날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내일이라는 시간이 궁금하진 않으니 과거로 가볼 테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진 않다. 분명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랑 손을 잡고 길을 걷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 바닥 위에 벌러덩 넘어졌던 그때로 돌아가려나. '엄마, 저기 조심해야 해.'라고 말할까?


분명 그러지 아니하겠지.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사라지게 할 일이 있나.


그러면 무얼 하려나. 새벽 공기에 얼어 터진 손을 하고 있던 노숙자가 있었다. 내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줄까 하다가. 마침 버스가 오고 있었고, '저 큰 손에 이 장갑이 맞을 일이 없지.' 하며 핑곗거리 만들어 모른 척했더랬다.


그때도 좋을 것 같다. 그다음 새벽에 큰 장갑을 가방에 욱여넣고 다시 가봤지만, 그곳엔 한데서 잠을 청하는 그 이는 없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 내 작은 빨간 장갑 벗어주며 맞지 않더라도 그 마음 한편은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근사한 말도 함께 건넨다면 내 삶에 한 구절이 얼마나 멋있으랴.


내가 얼마나 근사한 사람이 되랴.



이도 아니면, 바로 얼마 전도 좋으리. 가방에 있던 샌드위치를 건네지 못했던 부끄러운 내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으리.


마주하며 걸어오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게 차가운 샌드위치 하나 용기 있게 건네지 못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으리.


만약, 누군가 하나. 지킬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문래동 정신과 의사에게 '잘 지켜 드리란 말이 무어냐.' 이렇게 물으러 갈 수도 있겠다.


어린 내게, 희미하여 얼굴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가 잘 일러 준다면 그 끝이 그토록 처참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때 그 문을 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겁이 많으니 엄마도 부르고 아빠도 불러서 나 대신 가보라며 손을 저어 보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울리지 않는 얄팍한 희생정신 따위가 존재하는 터라, 그마저도 아니 되겠다.


그러니 그저 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다.


 어질러진 공기를 환기하려 창문을 열다 벗이 준 꽃병을 떨어뜨렸다.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


꽃병의 입구만 톡, 하고 부러져서 본드로 대강 붙여보려 하였는데 그마저도 되지 않더라.


그런데 부서진 모습 그대로가 예뻐서 그냥 두었다. 볼만하여,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이것을 예술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자. 미래로 가지도 말고. 미래를 알려하지도 말고. 과거로 가지도 말고. 그냥 지금 여기에 있자.


톡하고 부러졌어도 산산조각 나지 않았고,

여전히 아름다우니 그대여 여기에 그리고

거기에 그대의 모습으로 존재하라.


그런데 다만, 말하고픈 것이 있다. 이제는 알았으니 얼음 바닥 위에서는 조심하라고. 장갑은 벗어주라고. 샌드위치도 꺼내어 주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언제든 겁내지 말고 열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또 마주한다면 그러지 않아야지 하고 또는 반드시 그렇게 해내야지 하고  마음을 꾹 먹어보는 것.


그런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렇게 해내는 사람이 과거도 가고 미래도 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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