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의 장점 중 하나. 마치 부산에서 서울여행하듯 다른 국가로의 여행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점.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이 장점을 느껴보고자 잠시 영국 옆의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를 다녀왔다.
아일랜드로 넘어오는 비행기 안.
여느 때와 다름없던 비행기 밖의 풍경이 놓치기 싫은 순간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하늘 위 뭉게구름 위에 떠있던 나.
그 하얀 뭉게구름이 서서히 걷히더니 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잔잔한 구름 길이 새로이 열렸다.
마치 공연의 서막이 열리듯, 그 새로운 구름길을 따라 나의 새로운 인생길도 열리는 느낌이었다.
뭔가 처음부터 느낌이 좋았던 이곳,
이번 유럽여행의 마지막 국가였던 편안한 매력을 지닌 이곳, 아일랜드.
아일랜드에 처음 도착한 곳은 수도인 더블린이었다.
깊고 진한 맛의 흑맥주 기네스의 고향이자 전설의 밴드 유투의 고향인 이곳. 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더블린에서의아름다운 시간 속에 나는 내마음을 편안하게 놔둘 수 있었다.
1. 오래된 책장이 풍기는 멋에 취해가는 시간
더블린에 도착하고 처음 찾은 곳은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대학인 트리니티대학과 도서관이다. 사실 자연을 선호하는 나이기에 이런 명소에는 딱히 관심이 없지만 이곳만큼은 느꼈던 바가 다르다.
해외대학을 오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 역시 해외대학 특유의 캠퍼스 감성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하자 그 앞에 펼쳐진 초록 잔디는 더 빛을 내기 시작하고 그 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의 얼굴은 더 환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피크닉을 온 듯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한 푸릇푸릇한 잔디밭 위에 앉아 밥 먹고 책 읽고 이야기 나누며 그 순간을 여유로이 즐기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괜스레 나도 학생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문득 10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환학생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어간다. 지금보다 에너지 넘치고 열정 가득했던 그때의 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들처럼 학교 잔디밭 위에 앉아 도시락 까먹고 책 읽으며 여유로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 주위의 시선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나의 일상을 이끌어나가던 그때. 안 되는 영어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을 따라가고자 매일 밤늦게까지 수업 녹음파일을 반복해서 들으며 학구열을 불태웠던 그때. 난생처음 해보는 기숙사 생활에 모든 것이 설렜던 그때.
그때의 난 그 속에서의 생활을, 그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대학 외부 구경을 마치고 해리포터 도서관이라 불리는 올드 라이브러리를 향했다. 고작 도서관일 뿐인 이곳을 비싼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들어가야 하나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역시나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도 나왔다는 올드 라이브러리에는 롱 룸이라는 명물이 자리하고 이 속에 안겨 있는 켈스 서(the book of kells)라는 두드러진 볼거리가 존재한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하프를 보존하고 있다는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그 고급스러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65미터에 이르는 방 안에는 약 20만 여권의 도서들이 3층 높이에 달하는 높은 천장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데 이 수많은 고서와 문서가 뿜어내는 풍경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들여다보다 보면 어느새 이곳이 주는 그 웅장함에 압도당해 입을 쩍 벌리고 만다. 켈스의 서뿐 만 아니라 20만 권의 고서들로 가득 찬 오래된 책장이 풍기는 그 분위기에 저절로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우리나라 도서관이라고 하면 늘 뭔가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라면
이 도서관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세계적인 건축에도 꼽힐 만큼 도서관 자체가 그냥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대학 도서관을 가면 갑갑해서 보통 집에서 공부하거나 카페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캐나다에서도 미국에서도 이상하게 해외에서 공부할 때는 대학 도서관의 그 올드한 분위기가 좋아서 공부를 안 해도 늘 도서관은 갔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위해, 공부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책이 읽고 싶어 지고, 공부라는 걸 하고 싶어 지게 만들어주는 공간.
이곳에서라면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더라도 지루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2. 음악 선율에 마음이 흔들리는 시간
인적이 드문 더블린 그래프턴 거리에서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바로 2006년에 제작된 영화 원스의 오프닝 장면이다. 탄탄한 스토리만큼이나 감미로운 음악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영화가 되어버린 영화 '원스'. ‘원스’의 주인공 남녀가 만들어낸 음악 선율에 마음이 흔들렸던 그때가 오롯이 기억나는 공간. 바로 그래프턴 거리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겐 다른 어떤 명소보다 이곳에서의 추억이 아직까지도 내 가슴 저편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있다.
더블린을 대표하는 번화가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활력이 넘치는 그래프턴 거리에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들이 거리 곳곳에서 자신의 끼를 과감 없이 발휘하고 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거리엔 늘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그걸 듣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처음 그래프턴 거리를 들어서자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살 아래 감미로운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나는 가만히 서서 이 순간을, 이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아름다운 악기 소리가 조화롭게 울려 퍼진다. 악기 연주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데 넘치는 에너지가 이 거리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느낌이다.
또 조금 더 걸어가면 이번엔 거리의 예술가들이 나의 눈길과 발길을 붙든다.
각자의 연주 장르도, 연주 모습도, 실력도 다 다르지만 본인의 공연에서만큼은 진지함을 잃지 않고 진정으로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이 밀려온다. 관중이 있든 없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버스킹 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현실에 찌든 어두움이 아닌 현실은 힘들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느끼는 '즐거움'이, 절박함보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렇게 특별한 음악을 틀지 않아도 항상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이 거리의 낭만에 내 마음이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이 거리에서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내 가슴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음악소리가 담겨버린다.
그렇게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음악과 멜로디로 기억되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 '원스'처럼 그래프턴 거리에서의 행복한 순간이 더블린에서의 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내 가슴속에 저장되어 버린다.
특히나 한 어린 청년의 감성 짙은 목소리를 만났을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서서 듣게 된다.마치 그와 그의 목소리를 즐기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된 느낌이다.비긴 어게인 프로그램의 이소라의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보컬을 받쳐주던 유희열, 윤도현의 짙은 연주가 생각난다.
이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목소리와 기타 소리 만으로 만들어내는 그 음악이 주는 위로는 어디에서도 받지 못할 최고의 '위로'였다.
목소리 하나로 본인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진심으로 참 부럽고 이러한 순간을 만들어준 그 어린 청년에게 지금도 참 고마울따름이다.
나도 언젠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위안을 전해주는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래프턴 거리의 붐비는 사람들 속을 걷다가 아일랜드의 겨울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하러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자 그래프턴 거리의 랜드마크인 뷸리스 카페로 향한다.
1927년에 문을 연 이곳의 건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장식을 구경하며 따뜻한 커피 한잔에 나의 못다 한 하루를 맡겨본다.
3. 흥겹게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낮에는 감성 터지는 음악과 함께 했다면 밤에는 흥나는 음악과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더블린에는 음악과 술을 매우 사랑하는 민족답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펍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난 곳은 바로 템플 바(Temple Bar). 빨간 외관의 모습에서부터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이곳은 늘 현지인, 관광객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통기타 반주에 맞춰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는 밴드 공연과 함께 언제나 왁자지껄하다.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펍인 브레이즌헤드(brazenhead) 또한 남다른 분위기가독보적이다.
1198년부터 운영된 펍으로 무려 8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외관부터 12세기 중세 느낌을 풍기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야외 마당에는 말끔히 차려입은 어르신 신사분들이 멋스럽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이곳을 지나 이어지는 아늑한 실내에서도 아일랜드의 역사가 물씬 느껴진다.
이렇듯 다른 어느 나라의 펍보다 단연 최고인 아일리쉬 펍과 아일랜드만의 특별한 템플바를 경험한다면 어느 누구도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기네스의 고장답게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기에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나마저도 술을 즐기게 된다. 음악과 함께 목을 미끄러지듯 타고 넘어가는 기네스의 빼어난 맛에 취기가 조금씩 올라온다. 기네스를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아일랜드의바깥 겨울 공기가 주는 한기가 조금씩 사라지는 듯하다.
정신줄 놓고 보내는 흥나는 밤. 이곳에서는 어떤 스트레스도 남아나지 않는다.
원래 흥 많은 나이지만 한국에서는 수줍음과 다른 사람의 시선 뒤로 그 모습을 묵혀두었다면 이곳에서는 매일 밤 펍 투어를 하며 늘 음악과 술과 함께 나의 묵혀둔 흥을 마음껏 표출한다.
오랜 세월 아일랜드 사람들과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는 이곳 덕분에 더블린에서는 매일 밤 걱정 하나 없이, 잡생각 하나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