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사이, 그리고 시간(fin.)

2편

by Amy Kang
혈연으로 이루어진 우리, 자연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엄마와 나의 관계는 "당신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여러 시놉시스를 가진 옴니버스 영화 같았다.



메신저의 엄마는 무덤덤한 톤의 'ㅇㅇ(응응)'을 톡으로 보내며, 신경 많이 쓰게 되니 오지 말라고 했던 과거의 메시지와는 달리, 이것저것 시켜서 오늘 새벽배송으로 온 물품들이라며, '인증'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곤, 툭,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라는 말과 함께 내 얼굴에 때아닌 미소를 지어 보이게 했다.


분명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유리장미와도 같은 사람 이것만, 왜 자식에 관한 거라면 이토록이나 무뚝뚝한 여자가 되는지...

항상 본인은 흑백의 모노톤으로만 살아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내가 좋아할 만한 한국의 요구르트, 빵, 간식, 등을 바구니에 담았을 거라는 그런 장면은,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애니메이션처럼 컬러풀하고, 다채로웠다.


나름 대표 대문자 J (MBTI는 나름 얼마 없기로 유명한 INTJ, +나름 영국기업에선 MBTI가 한국의 인적성처럼 사용되기도 한단다)로, 한국방문을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분명 방사능은 5-6주 풀타임으로 치료한다고 하셨으니, 내가 이때즈음 나가면 엄마의 초반은 아니어도, 후반 끝날 때까지는 있을 수 있다는 계획과 함께, 나는 약 3주 반의 한국행을 꾸렸다.

내가 나의 가족에게서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최대치의 시간이었다.


진단을 받을 때,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치료는 꼭 있겠다는 담담한 포부와 함께,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는 엄마와 모든 치료를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하필 당시, 서울에서 경기도권으로 이사한 이 마당에, 신촌까지 왕복 왔다 갔다를 새벽부터 매일 해야 한다니... 안 그래도 아침잠 많아, 아침 개 산책도 힘들어하는 나라 상당 아찔했지만, 다 큰 딸래 미,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냐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다사다난한 3주 반의 여정이 시작이었다.


자기가 정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주는 변화구는 정말 어디로 갈지 예측 불가하다.

그 후폭풍은 또 엄청난 상처로 나에게 온다.



3주간 엄마와 함께 왕복 외래치료를 함께하며,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암환자들이 정말, 정말, 무지하게 많다. 상상을 초월하게 많다. 암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둘째, 대학병원 외래진료는 정말, 정말 다니기 힘들다.

마지막,

셋째, 나는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댄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같이 영국에서 살던 그 2달의 시간 동안, 나와 엄마의 성격을 엑스레이 찍듯 본인의 뇌에 각인했나 보다. 너무 빤하게 우리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았다.

댄은, 내가 한국으로 나가기 1주일 전부터, "어머니가 너한테 뭐가 필요한 건지, 네가 왜 나가는 건지 잘 생각하고... 엄마가 필요한 걸해."라는 말을 하루, 이틀, 삼일을 연속으로 잔소리하듯이 했다.


나는 괜스레 큰소리로 “엄마 아픈데 내가 무슨 잔소리를 한다고…!” 라며 허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상당히 양심에 찔린다.


댄의 예상이 맞았다.

나는 정말 댄이 말했던 잔소리의 딱 정반대로만 행동했다.


엄마가 나에게 원했던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견뎌내고 있는 엄마에게,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였는데...... 나는 오히려 앞에 줄 안 보이냐고, 줄 제대로 타라고, 더 빨 리가라고 했다.

땅밑에서 두 다리 딛고, 고개 들어 엄마의 더딘 걸음을 보고 있던 나는, 무진장 공포스러울 당신의 입장을 생각지 못했다.


내가 편한 곳에 있어, 환갑이 넘어 매일같이 외래를 통근하듯이 하는 이 불편한 상황을 견디는 엄마가, 당연 힘들고 아플 수도 있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걸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걸 엄마는 다시금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엄마와 나는 데칼코마니처럼, 왼쪽 오른쪽, 찍힌 곳만 다를 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성별.

장녀라는 타이틀.

아버지의 부재.

폭력적인 가정환경.

이 몇 개 되지도 않는 특징들이 우리를 같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스물여섯, 학교라는 세계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 여자로서, 사회인으로서 자기가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어른으로서 살 때 즈음, 나는 이 나이즈음에 나를 낳아, 온갖 핍박과 곤란한 세상 속에서 살았던 엄마의 세상이었을 그 때까 내 눈앞에 영화처럼 다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져 버거웠다.

이 세상이 지금도, 그때도 너무나도 불공정하고 매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 안의 화(火)와 앙금이 골칫덩이가 될 줄 알면서도 쉬지 않고 쌓았다. 언젠가는 다 괜찮은 연료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되뇌며. 그렇게 암과 같은 내 화가 쌓였다.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만, 또 같은 세상을 보고 살고 느끼고 있는 나는, 어떻게든 이 굴레를 벗어나,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남들 앞에 떵떵 거리며 소리치겠다 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내가 '나아진다고' 착각하니, 그즈음, 엄마에게 바라는 점이 많아졌다.



영국은 아직 출산율이 그대로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던 안 하던 아이는 계속 낳겠다고 하고, 임신한 사람들은 꼭 길거리에 2-3명은 보인다.


아직까지도 너무 신기한 광경이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계절상관없이 항상 똑같은 한 풍경이 있다.


“Mommy, Mommy!!”

“Yes! Darling? “


이렇게 희한한 대화라니!

"엄마, 엄마!"..."어 그래 아가?" 직역하면 이쯤 되는데, 이건 너무 이질적이었다.


여기도 아이에게 설설 기기만 하는(?) 그런 극성맘들이 있구나 했다. 일주일도 안 돼, 이건 여기 대부분의 어른들이 (남녀노소 불문) 아이와 하는 대화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신없는 쇼핑센터 안에서 그렇게 시끄러운데도.

눈비바람 갑자기 몰아치는 놀이터에서도.

등하굣길에서도, 전화로 사무일을 보고 있어도 어떤 시공간에서도 단 한 번도 꾸짖는 남녀어른, 남녀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을 본적 없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급박해 죽겠는데, 땀나는 상황에, 아이가 100번을 부르면 100번다 '예스, 달링'이라니.

여긴 다 보살만 사는 곳인가.


아스버거 증후군과 ADHD를 가지고 있는 남자 조카는 하루에도 목소리 100과 1000을 왔다 갔다 거리며, 수십 번 수천번씩 엄마아빠 및 어른들을 찾는다. 대답이 없으면 대답이 있을 때까지…

댄이 그 집에 놀러 가면, 그 대상은 댄으로 변한다.


게다가 댄의 닉네임이 거기서는 '댄댄' 이기 때문에, 저 'Dan'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하루에 200배 이상 듣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댄댄... 댄댄? 댄댄?? 댄댄!! 댄댄!!!

예스, 달링.


가끔 청각에 예민한 나는 귀를 막는다.

그리고 내적 공황에 들어선다. 아니... 뭐지? 저런 생떼와 어리광이 가능한 거였나?

댄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가 엄마였음 한 대 때렸어…”


“첫째, 웰컴투 영국.
둘째, 때리면 잡혀가.
셋째, 아직 애잖아.”

갑자기 울분이 솟았다. 욱했다.

아니, 애라고 저게 다 가능하다는 건 어디 룰이었지? 애도 알건 다 알지 않나?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욱하고 화나고, 짜증을 내다, 결국은 원점의 원초적 질문으로 돌아왔다.


왜 우리 엄마는 … 왜 우리 집은… 왜 나는?


나는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었다.

좋은 쪽으로 이던, 나쁜 쪽으로이던 어쨌든 한국의 나와는 먼 거리를 두고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변태'자체를 하고 있는 내가 마치 신이라도 된냥, 나는 내가 마치 기준인 것처럼 행동했다.


똑같은 상황과 조건 속에 자랐지만, 나는 더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며, 왜 우리 엄마는 이제 것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변해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이건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했던 짓을, 똑같이 나한테하고 있는 거잖아?
너무 불공평해.

나는 '불공평'이라는 단어에 엄마를 쑤셔 넣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 불공평이었다.

나도 엄마에게 맞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지애비 닮아서...'라는 소리 주야장천 듣고 싶지 않았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고, 학교에서 집으로 못 돌아가고, 집 앞 놀이터 돌계단에서 남들 모르게 훌쩍거리며 울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행하고 싶었다, 가족사진 찍고 싶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건 이미 일찍이 알았지만, 그 '세상'에 엄마는 없었나 보다.

엄마가 나에게 한 행동들에 한번 '불공평' 도장이 찍히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었다.


그때부터 내가 일전에 쌓아왔던 화(火)가 마치 모아놓았던 장작더미에 붙은 것 마냥 쉴 새 없이 번져갔다. 산불이 되고,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우는 걸로는 그 불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렇게라도 내가 지금 너무 힘들다는 걸 다른 방식으로 알고 싶었다.


옆에 있는 남편은 당황스러웠고, 나의 강아지는 무서워했고, 댄의 가족들은 나를 걱정하고, 그리고 처음 있는 상황 자체를 걱정했다.


결국, 상담가를 찾았다. 어떻게든 모르는 영어는 내가 찾던, 챗지피티를 쓰던, 찾아내면서라도 뱉어야 했다.

영국의 심리상담가에게 한동안 못 부렸던 어리광을 부렸다. 나의 비밀스러운 트라우마들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풀고, 그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던 건지를 단어를 찾으면서까지 객관적으로 듣고 나니, 상황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럴 땐,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게 살짝 좋다.




나는 변해갔다.

변하기로 마음먹은 나도 있었지만, 변할 수 있는 시간과, 기반을 만들어준 건 엄마였다.

그렇게 '변하라고' 나를 키웠기 때문이다.


배움은 끝이 없는 거야. 공부도 끝이 없어. 다 끝났다는 듯이 살지 마.

고등학교 모의고사 때마다, 대학교 입학시험, 대학교 졸업시험등을 준비할 때마다 엄마가 한 말이다.

나는 그렇게 "변할 시간"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달랐다.

엄마는 다른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더 나은사람으로, 혹은 '어떠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그런 시간과 조건이 없었다. 주어진 타이틀에 끼워 맞춰사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배웠고, 나중에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엄마는 자신이 몸 아파 낳은 자식들을 위해서, '그건 너에게' 주겠다는 마음으로 결국 끼워 맞추는 존재로 다시 살았다.


아버지가 있을 적, 그는 매일같이 말했다.

"너는 연대, 고대가 만나 생긴 사람이다. 서울대는 껌이고, 너는 천재다. 너는 엄청 특별한 사람이다. 그대로 살아라."


나 자신은 특별하다고 배웠지만, 살아보니, 나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먼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걸 알 때까지의 살고 있는 세계에서의 고통스러운 수용과 인정에 과정은 나에게 좋은 변화의 거름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거름이 되어서 변화를 만들어내라고 나를 키웠다.

그걸 좋게 좋게 이른 시각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걸......


결국 우리 둘이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 "만족에서 오는 조용한 평온함"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몸소 보이는 강함, 독립적 개체,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인정과 긍정으로 나에게 사랑을 표하고, 그렇게 나에게 관심을 내보였다.

나는 그와 달리, 엄마에게 사랑과, 따스한 관심, 시선을 요구했다. 영화와 드라마, 애니에서 보았던, 항상 어린 누군가를 감싸안는 여자어른은 '무엇인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하는 어른이 내가 너무나도 원했던, 현실과는 정반대로 다른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변태를 거듭하는 나는 또 배웠다.

몸소 오장육부를 모두 내어주며, 굽히라고 지르밟아도 휘어지지 않는 굳센 강함과 독립성으로 보여준 엄마는, 비록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와 같은 따스한 말은 없었지만, 내가 변할 수 있게 끊임없이 배움을 멈추지 않게 해 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엄마가 암에 걸리기 전, 환갑을 맞아, 내가 모아놓았던 돈과 세워놓았던 계획을 바탕으로 스페인여행을 했다.

난생처음 있던, 엄마와 나의 단둘의 해외여행이었다.


해외에서 산지 인생의 절반이 넘도록, 남들은 잘만 가던 모녀해외여행을 우리는 이제야 갔다.

엄마는 내 졸업식도 오지 못했다. '돈 몇 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 그것마저 생활비로 조금이라도 더 넘겨주려, 엄마는 한국에서 일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를 본받아(?), 졸업식날 졸업식을 가지 않았다. 어차피 사진만 찍고 하하 호호하는 곳, 하하 호호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그 시간에 나도 돈을 벌어,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지만 항상 좋다고 표현할 줄 모르고, 이런저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고픈 생각은 있지만, 언제 해야 할지 몰라 어영부영 넘기는 엄마.

왜인지 이 좋기만 한 상황이 비눗방울처럼 펑 터질까 조마조마 하지만, 그마저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는 엄마.


스페인에서 나는 엄마는 나와 다른 사람이란 걸 받아들였다.

그때도 싸우고, 지금도 싸울 수 있지만, 나는 이제 엄마를 같은 '나'로 보지 않는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우리... 항상, 가족이니 자연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엄마와 나의 관계는 "당신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여러 시놉시스를 가진 옴니버스 영화 같았다.


옴니버스 영화는 감독이 여러 명, 스토리도 여러 개다. 보는 시각도, 느끼는 감성과 톤 앤 매너도 다 다르다.

나는 옴니버스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 식의 다채로운 스토리가 있을 수 있는 영화는 옴니버스뿐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리 생각했다면, 엄마는 그럴 수 있다. 내가 반대를 하건 찬성을 하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엄마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엄마는 누군가 통제해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누구일까, 그걸 생각할 수 있는 건 엄마뿐이다.
그걸 생각하고 싶지 않던, 생각하고 싶던... 그 또한 엄마의 결정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평온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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