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물친구의 세계 그리고 매일

#

by Amy Kang
"너의 하루, 나의 하루... 왜 그렇게 다를까?
너는 어떻게 매일이 새롭고, 즐거울까?"


나는 항상 고양이 파였다. 강아지라는 동물친구는 내 인생에 없었다 이제껏.

처음으로 나의 인생파트너와 함께 '개'를 입양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나 자기 혼자 먹고 싸고 자고를 반복하다, 밤에 잘 때 즈음이면 쓱 일어나 자기 혼자 놀다 자기 혼자 자다가 그런 독립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와 정반대로 강아지는 나와 같이 매일 일어나고, 매일 음식을 먹고, 같이 쉬고, 같이 걷고, 같이 저녁을 맞이하고, 항상 모든 것을 손잡고 같이 해야 했다.

마지막에는 자기가 잘 곳으로 돌아가, 나는 침대, 그는 반려견 철창 속에서 잠을 청하기까지...


그리고 해가 뜨면 똑같은 하루를 맞이하고, 그리고 해가 지면 똑같이 마무리한다.

하루가 다른 적은 거의 없다.


내가 이 아이를 들여와서 돌볼 때 즈음, 나는 회사에서 포지션이 없어졌다는 통보를 들었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나는 풀타임 도그맘(Dog Mom)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네가 지금 보내는 이 생활을 엄청 꿈꾸는 거 알아?

매일이 괜찮을 거라는, 응원한다는 나를 언제나 지지한다는 펩톡(Peptalk)이었고, 남편으로서 친구로서 습관적으로 나를 달래는 어화둥둥의 매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상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괜찮던 나의 남편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풀타임 도그맘, 풀타임 가정주부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징징 데는 와중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제 그만 징징 대라는 어른이 되어보라는 화가 담긴 소리침과 함께, 다른 여자들은 이런 생활을 꿈꿔도,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못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그 과학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팩트를 늘어놓고는 나를 질책했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내가 느낀 매일의 아기강아지의 보모가 된 것 같은 이 힘겨움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왜인지, 나는 잠이 모자랐고, 힘이 모자랐고, 강아지의 대한 나의 관심도도 확연히 모자랐다. 나는 침대에서 기어서 나와야 생활이 그나마 가능한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중간지점을 찾아, 어떻게든 이 조그마한 생물체가 내 곁에서 행복하게는 몰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육체적으로 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우리 모두를 훈련시켰다.

항상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활동을 하고 똑같이 잠에 드는 것,
하루의 루틴화가 필요했다.


다행히 나의 동물친구는 대문자 E이다. 외향적인 게 분명함에도, 움직임은 또 상당히 조용하고 젠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이 집안에서 적응 못하고, 어렵게 또 힘겹게 살아가는 생명체는 오직 나 한 명이었다.

이제 하다 하다, 강아지마저 질투하게 되었다.


그냥 자고 일어나고 먹고 싸고, 오줌만 제대로 싸도 칭찬받는 강아지의 삶.

그리고 그와 반대로 잘 먹고 잘 자지도 못하면서,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사회생활이나, 생산활동도 못하는 나의 인간의 삶.


무엇인가 모자라도 한참이나 모자란 나란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동물을 챙기고 보살펴야 했다.


너무 힘겨워 정말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좋다고 데리고 온 강아지 때문에 '죽고 싶다'니.

나도 이런 웃프다 못해, 남들이 들으면 너무 코믹 같아 웃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닌데, 내가 나 자신이 통솔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힘들게 맞춰온 하루의 루틴이었다.

내가 엄마의 암치료 보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웠던 그 3주간, 헨리가 바뀌어있었다.


내가 풀타임으로 그를 돌봐야 하는 날마다 헨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밖으로 뛰쳐나가, 입에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며, 나 보란 듯이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기 시작했다. (어느 동물이던 돌멩이는 좋지 않다.)


헨리의 난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저 교활한 20kg가량의 털뭉치 때문에, 엉엉 울었다.

누가 강아지가 인간보다 키우기 쉽다고 했는지, 가서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동물 때문에 우는 지경까지 와버렸다니.


나는 분명, 이전과 똑같이 일어나, 똑같이 밥 주고 물 주고, 용변 뉘이러 뒷마당에 헨리를 데리고 간 것이 다인데,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계속 굴렸다.

그렇게 시위하듯 밖에 돌멩이로 장난을 치다가도, 댄이 집에 오기만 하면,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마치 '세상에 누가 돌멩이로 장난치냐'며, 빤한 얼굴로 우리 둘을 쳐다보며, 안 그런 척 쌩을(?) 깠다.


이렇게 심히 억울하고 분한 상황은 약 2주간 계속되었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챗지피티에게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 같냐고 하소연하듯이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내가 예상했던 답변은 아니었다.


"He’s responding to a world that feels different because you feel different."
- 그는 나의 변화된 마음을 느끼고,
그에 맞게 자기 세계를 바꾸어 반응하고 있는 거 같아



지피티씨가 써준 문장을 보고 다시 보고 또 봤다.

World가 다르게 느껴지다, You가 다르게 느껴지다.

'World(세계)'가 'You(나.)'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바뀌어서, 그의 세계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다시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폰 위젯에 뜬 사진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나와 그가 처음 만난 그때였다.


아직 그가 헨리이기 이전, 그가 '오렌지'색깔의 목줄이었을 적.


집에서 무려 300마일이나 떨어진 옥스퍼드의 어느 작은 마을로 브리더를 만나러 갔다.

처음 입양하는 강아지라, 남편이 브리더를 통해서 입양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을 것 같다고 해, 어렵게 찾았다.


헨리의 친엄마인 골든레트리버 '비(Bea)'는 정말 크고, 아름다운 엄마였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를 데리러 가려는 인간 사람에게 이렇게 꼬리 치며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죄책감이 들정도로, 우리를 굉장히 환대했다.

어서 오라고 꼬리를 세차게 치며, 펜스 너머로 우리에게 인사하면서도 강아지들에게 강한 훈계도 주던 그런 모성애 싶은 엄마였다.

사진으로만 보고 랜덤으로 골랐지만, 직감대로 제대로 골랐다 싶었다.


나와 댄에게 슬며시 와 그 조그마한 얼굴을 기대던 아이.
그리곤 우리 뒤로 돌아가, 바지 뒷주머니 쪽에서 잠에 든 오렌지 목줄 아이.


그를 안아 들으며 난생처음 느껴보는 뭉클하고, 품에 안긴 그의 어린 몸만큼이나 따뜻한 느낌이 나에게 더욱 큰 사랑과 확신을 주었다.




나는 그의 세계였다.

정확히는 우리 반려인들이 그렇다.

내가 그를 입양하기로 하고 안아 든 그 바로 순간, 나는 그의 세계가 되어주기로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놓고, 내가 나의 문제로 힘들다고, 그를 산책시키고, 돌보고, 청소하고 놀아주기가 벅차다고 울고 있다.


내가 무너지고 있으니,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선 지진이 나고 흔들리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폭풍우와 천둥번개, 해일은 계속 그의 세계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인간이 싫어할만한 행동으로 주위 끌기.

인간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는 강아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똑같이 뒷마당으로 나가, 헨리는 곧장 돌멩이를 집어 들고 술래잡기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간식으로 꼬여내고, 소리쳐 부르는 대신, 신발을 고쳐 신고, 열심히 그의 꼬리를 쫓았다.

얼마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열심히,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헥헥거리며, 돌멩이를 내려놓은 순간, 돌멩이를 바로 치우고, 그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고, 화내고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약 한 달 동안 계속 배변활동 전, 술래잡기가 반복이었다. 거의 오후 내내 하루의 일과라고 해도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는 더 이상 돌멩이에 관심 갖지 않았다.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던 용변 누는 시간이 더 이상 나에게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때 보다도 훨씬 많이 자란 헨리는, 가끔씩 달라지는 뒷마당의 스폿에, 잘 보고 있냐는 듯이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오줌을 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이런 느낌 일까.



기다란 생강 색깔의 속눈썹 한 짝,

뭔가 생각할 때면, 왼쪽으로 데굴굴리는 이쁜 갈색눈 한쌍,

항상 벌렁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코 하나,

앙다문 귀여운 입 하나,

네발이나 손처럼 쓰는 앞발 한쌍,

점프할 때마다 열일하는 뒷발 한쌍,

쓰다듬을 때마다 시원한 기지개를 불러오는 얄팍한 배,

다른 곳 보다 왠지 가죽이 헐렁한(?) 목덜미,

가끔 미역국 냄새가 나는 귀,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털이 나는 머리,

유일하게 감정을 명확히 보이는 기다란 꼬리.


생긴 거만 조금 다를 뿐, 우리네의 삶과, 행동방식이 결국 그다지 다르지 않은 우리 동물친구들...

어쩌다가 너는 반려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보다 하등동물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은 포유류과 동물인 그들은, 군산 개고기 공장 같은 곳에 끌려가 그런 취급을 받을까......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닐까.

디스토피아 세계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인간이 하등 동물로 취급될 때가 있다. 과연 그 세계가 안 오리라는, '절대'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언젠가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공장에서 차가운 몸으로 고깃덩이처럼 쌓일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카르마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엄청난 쌍 X이다.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하는 산책 마니아였다. 하루에 10마일씩 걷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위 마을 사람들은 그가 나오는 시간이 워낙 정확해, 산책시간을 통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았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소설을 쓸 때 이외에 시간엔 무조건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하루일과를 보낸다고 했다.

그렇게 글을 쓰는 시간 외의 모든 변수를 같게 해야,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다름을 세밀하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루소와 하루키를 반려견, 동물친구에 비유한다고 하면, 비하일까?

내 뇌로 이해하는 바는 비하보다는, 이 셋 모두가 정말 위대한 생물체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모든 동물친구는 루소고, 하루키가 된다.


매일같이 우리를 보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잠들고, 똑같은 사람만을 바라보며 사는 이 동물들처럼 지루하고 단일한 삶이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왜인지, 그들만이 세상을 정면으로, 올바르게 바라보고 느끼며,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스펙터클해야 하고, 사건사고가 많아야 하며, 개성도 느끼는 행복이나 우울 슬픔도 가득가득, 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 혹은 회사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지루하고 우울해, 왜 나는 이렇게 밖에 못 사는가, 인스타그램에 사람들은 항상 연말파티에 가는데, 왜 나는 연말 파티는커녕, 친구도 없는 거지 하는 시기가 분명 있었고, 아직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핸드폰과 전자시계배경에 깔린, 나를 보며 '미소' (분명 짓고 있는 미소)를 짓는 헨리, 나의 유일한 친구.

아침, 점심, 저녁, 그 어느 때라도 이 아이의 신선하고, 있는 그대로의 웃음을 볼 때마다, 나도 조금씩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시간 뒤 울지언정, 오늘도 여전히 내 폰 배경사진의 헨리를 보며, 나는 웃는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