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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시간이 이렇게 끝나버릴까, 손톱을 물어뜯으며 패닉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날이, 내 인생 통틀어 딱 두 번 있다.
굉장히 후덥지근하던, 전형적인 한국의 장마철, 7월.
인천의 한 모 병원에서 26살 된 한 여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응급실로가 단 두 시간 만에, 3.9kg나 되는 우량아를 뱃속에서 내보냈다. 아버지라는 남자는 성별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었고, 막 '엄마'가 된 여자의 꼬장꼬장한 부모님들은 헐레벌떡 뛰어와, 소고기 넣고 미역국을 한솥 끓여놨다고 먹을 건 걱정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마지막까지, 집에 가면 꼭 먹으라고 당부를 여러 번, 그리고 '너네 남편은...'으로 시작해 한숨과 욕으로 끝나는 별로 여러 번씩이나 듣고 싶지 않은 담화를 뱉어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20대 중반의 어린 여자는 그렇게 막 지금 뱃속에서 핏뭉텅이 하나를 빼내고, 대책 없이 엄마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뱃속에서부터 편치 않은 삶이겠다 한 아기였던 나는 한집안의 장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요이땅! 하듯이... 트랙을 뛰어야 하는 우리 두 선수는 서로가 같이 뛰어야 하는지도 모른 체,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이인삼각' 경기를 뛰었다.
내 기억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3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 시간이 그렇게 건강하고, 화목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마녀의 시간; 엄마와 나의 시간이 끝나버릴까 봐 혼자 손톱을 물어뜯으며, 대공황상태를 보냈던 날들이 현재까지 딱 두 번 있다.
꼭 안 좋은 것들은 한꺼번에 몰아친다. 이 뭣 같은 상황들은 내가 내 인생 통틀어, 나에게 '엄마'라는 인물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딱 찾아왔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머리가 지끈지끈 매일이 고통이었던 소송이혼과 합의 이혼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자칫 잘못하면 아직 미성년자 태를 벗지 못한 내가 법정에 설 수도 있었던 그런 이상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였다. 중국홍(中国红), 북경올림픽 등 한창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할 것이라며, 떵떵거리고 있던 상황, 뉴스에 한시도 그치지 않고 나온 그 나라에, 우리는 그냥 대책도 없이 가버리자 했다.
이혼이 다 마무리가 될 즈음, 엄마,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3인가족으로 편승된 우리는 편도행 티켓을 들고 공항에 나갔다. 짐은 얼마 되지도 않아 부칠 것도 없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아끼던 책들, 수집하던 만화책, 앨범에 몇 장 있지도 않던 나와 동생이 담긴 사진 앨범, 학교 졸업앨범등... 무게가 나가는 종이들은 몽땅한데모아 아버지라는 사람이 고물상에 몇천 원에 주고 팔아버렸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며 수집하던 내 곰돌이 인형들 모두, 그것 또한 헌 옷수거함에, 다 쳐너어버렸다. 어차피 성인도 다 됐는데 인형이 뭐가 필요하냐면서...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나는 한 손에는 이민가방, 한 손에는 여권을 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다들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모르는 단어와, 모르는 글자를 쓰는 이상한 나라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가 잠시 한국에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 갔다 오겠다고 중국집을 나섰다.
비싼 국제전화카드를 충전하며 사용할 적, 갑자기 내 휴대폰으로 국제전화 +86으로 시작해 0000으로 끝나는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번호다.
당시 알고 지내던 이모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에게서 비현실적인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응급실에 있다는 전보 같은 소식을 뒤로, 엄마는 수술이 아니라 시술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이어서 다행히 지금은 시술 끝내고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했다. 전화 충전이 다되어, 지금은 일단 끊는다며, 달칵 전화를 끊었다.
엄마가 안정을 찾아 비행기에 탈 수 있는 데로 바로 다시 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뇌출혈이라니, 그 영화,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거? 사람이 휙 쓰러져, 뇌에 있는 그 많은 혈관 중에 하나가 퍽 터져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거? 머리에 시한폭탄을 달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그거?
주민등록증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나는 18-9살의 '미자'의 나이어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아니, 우주 전까지 다 치렀다고 스스로 믿었다.
나는 앞으로의 사건에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는데,
그 산전, 수전, 공중전에서 우주 전까지에는 뇌출혈 걸린 엄마는 없었다. 확실하다.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쿵, 다리가 쿵이었다.
이모에게 알겠다고 하고 끊은 전화를 뒤로, 정말 온갖 생각들이 (안 그래도 많은 생각들에...)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내 머릿속에서 우왁부왁 소리치고 있었다.
아직도 느지막한 사춘기를 견뎌내고 있던 나와 동생은, 어른이 아직 필요했다.
아니, 가족, 그중에서도 엄마... 엄마가 너무 필요했다. 그래서, 그때 상황이 너무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생각이 짧던 나는, 그게 설사 '죽음'일지라도, 당시 상황에서 도망쳐 엄마의 부재를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조용히만 있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했다.
아직 중학교다니느 동생도 있으면서, 동생의 존재는 나에게 무의미했다.
그렇게 나는 철이 없었다.
어영부영 (심지어 나는 동생에게는 엄마가 돌아오기 하루 전에 내용을 전달했다), 1주일이 지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다크서클이 짙어 멍같이 보이던 자욱의 익숙한 얼굴이 우리가 살던 중국 집으로 들어왔다.
보통이라면 엄마가 계단을 타고 (2층이었다) 올라오는 특유의 탁, 탁, 탁, 탁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몸무게가 빠진 건지 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정말이지 귀신처럼 조용히 문지방을 넘고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는 바로 쉰다고 하고 자신의 안방으로 들어가 그날 하루는 나오지도 않았다.
'도대체가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뭘 할 수 있는 거지?'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었다.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들어가 버리면, 내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문을 부실정도로 쾅 열고 들어가서, 엄마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하면서 화를 내는 걸 기대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귀신처럼 조용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주길 바라는 걸까?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직, 빨래, 청소 등 앞으로 내가 다 해야 하는 건가? 관리비, 생활비.. 나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야 하나? 등등.
어쩔 때는 감정적이고, 어쩔 때는 지독하리만큼 현실에 찌든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바이러스 걸린 노트북의 팝업창처럼 띵띵 띵 울렸다. '누나 뭐 해..?'라는 동생에 말에, 나는 그때까지, 거실 한가운데 아무것도 안 하고, 제자리에 서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모든 복잡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하는지 모르겠다는 과부하 걸린 나의 뇌는 몸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나 보다.
그 이후로, 나는 해당 사건(?)을 통해 엄마가 할아버지처럼 고질적인 고혈압이라는 걸 알았고, 이후로도 웬만하면, 엄마의 뒤통수를 잡게 할 일은 만들지도, 하지도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해도, 네가 통제할 일은 어차피 손에 꼽게 되어있어.'
그리고 2025년 말, 방금 몇 달 전까지 일하던 자리가 없어진다는 소식은 그다지 나에게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이것만 다른 건 없으니, 이게 나의 액땜을 한 것이다라며 남편과 자위했다.
이제 더는, 나쁜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 했것만, 11월 엄마는, 바다 건너 대륙 건너 약 6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나에게 카톡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나에게 걸어오는 전화는, 항상 그렇게 심장 떨릴 수밖에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삶의 모토를 가지고 있는 양반이, 먼저 걸어오는 전화는 항상 답이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암이었다. 현재까지 암이 그래도 상당이 많이 진행되어, 자궁을 들어낼 수 있는 수준을 지났고, 아마도 주변 림프관 쪽으로 전이된 것 같다고 했다. 정확한 진단은 약 1달 뒤에 나오며, 그때까지 그냥 본인은 조용히 있으려 했지만 (어차피 해외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너희 동생이 하도 닦달을 해서 이렇게 전한다는, 듣기에 굉장히 서운하고 매정한 배경상황(?)도 전했다.
고모 들다 암으로 요절하시고, 친가 쪽도 외가 쪽도, 다 암환자가 하나도 아니고 몇 명씩이나, 체질이다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 1촌 엄마가 부인암을 진단받은 것이다. 초기도 아니고 그것도 3기에 가까운 자궁경부암을 말이다.
왜 나는 엄마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마다 이렇게 멀리 있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내 머릿속에 항상 나에게 소리치는 이 자식은
"네가 어차피 곁에 같이 살았어도... 뭐 해줄 게 있어? 너 백수잖아?"라며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프다......
누군가 나에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다들 결혼이라는 제도를 결심하는 것일지도... 항상 하는 보이스톡에서는 나와 엄마가 우악 부악 소리를 지르듯이 수다를 떠는데, 그날따라 뭔가 조용하다는 걸 눈치챈 댄은, 눈치 빠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댄이 엄마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분명 귀로 들을 때는 그렇구나 했던 소식을 내입으로 내 혀로 내뱉고 나니,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고장 난 자판기처럼 눈물을 계속 뽑아댔다.
그리고 바로 대문자 T인 남편은, 울지 말고, 당장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편을 알아보라며, 너 당장 나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자신과 헨리는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빠른 비행기표 끊어서 나갔다 오라고 했다.
엉엉 우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닭똥 같은 눈물을 뽑는 눈을 돌려, 나 돈 없다고 조용하게 말했다. 너는 없어도, 우리는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라는 표현이 너무 좋았던 건 처음이었다.
불안증을 백팩 키링 마냥 달고 사는 나는, 당장 편도 끊고 달려가야 하는, 내 집에서 벗어나야 하는 그 상황이 너무도 불안했다. 나 빼고 여기서 하하 호호 있을 헨리와 남편의 모습이 희한하게 그려졌다.
어떻게 지금 당장, 무슨 졸부처럼 2백만 원도 더 되는 왕복권을?
아무런 설루션도 딱히 없이, 이렇게 그냥 한국에 나가도 되는 걸까?
나 지금 수입 없는데?
그리고 헨리는 그럼 누가 보지?
댄이 사무실 나가야 할 때에는?
내가 나가서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엄마는 손에 손잡고, 엉엉 울거나, 어화둥둥(?) 하는 걸 원치 않을걸?
당장 치료할 때 쓰라며 돈을 턱 줄수도 없고, 내가 간병인이 될 만큼 그렇게 쓸모가 있는 아이였던가?
엄마 결벽증이 너를 미치게 할 수도 있는데? 너 그렇게 자신 있어?
쓸데없이 현실적인 고민들이 내 머릿속에서 볼륨 100으로 소리쳐대고 있었다. 너무너무 시끄러웠다.
과부하온 나의 머리를 어떻게든 다스리려 나의 다리 떨림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달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 끊이지 않았던 시끄러움과, 육체적인 반응은, 내가 잠들 때 먹는 약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날따라 나를 힘들게 했다.
그날따라 든든했던 남편의 등뒤로, 나는 핸드폰을 켜, 알아보았던 비행기 편을 구매했다.
그리고 한국시간으로는 아침, 바로 비행기 편 정보를 가족 그룹톡에 전송, 이때 나갈 거니, 다들 다른 소리 말고 기다리라고 대차게 이야기했다.
당장 엄마가 필요한 건, 그래도 가족 멤버가 다 같이 있는 것일 것이라고 대차게 나에게도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틀리지도 맞지도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