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사람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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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Kang
"나라는 인간은 어쩌다 덜 말려지고 덜 볶여,
사회에 던저진 생맛 그대로의 콩인가 보다."




유난히 한국인들이 가장 소비를 많이 하는 기호식품 1위, 커피.

커피는 다른 티종류와는 달리 우려 지거나, 스무디처럼 갈리고 짜지고(?), 그 비싼 즙 짜는 휴O으로 즙을 내거나 해서 마실 수 있는 종류의 음료가 아니다.


우리 손에 들린 컵에 내려진 '검은 물' 중에는, 크레마가 잔뜩인 따뜻한 아메리카노, 혹은 애기 찻잔 같은 컵에 놓여 원샷도 가능한 진한 에스프레소, 한국인 특 아이스 잔뜩 겨울에도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등. 이모 든 것은 사람에 의해서 한참이나 달달 볶이고, 구워지고, 갈리고 나서야 마침내 음료로 탄생가능한 출발선에 섰다. 손으로, 기계로 여러 방식을 거쳐서야,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검은 물이 만들어진다.


원두콩으로 변해지기 전의 커피열매는 아주 많은 지역에서 나고 자라난다. 해가 쨍한 더운 지역에서 보통 나고 자란다고 알려져 있지만, 21세기 기술이 좋아진 요즈음에는, 세계곳곳에서 커피열매를 찾아볼 수 있다.


14세기 15세기 즈음 (아마도...) 본인 같은 피부색에, 자신이 입고 있는 의복과 같은, 그리고 비슷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천진난만했던 유럽권 백인들은, 큰 배를 만들고 세상을 정복하겠다며 바다로 사활을 걸어 나아가고 나서야, 세상에는 꽤나 많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음식 및 자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본인들이 만든 것도 아니지만, 본인들의 가장 큰 문화였던 차(Tea) 문화를 버려버리고, 마치 자기 것 있던 것 마냥, 커피로 금세 갈아탔다.


커피는 남미 쪽이 가장 제일이라고, 그 외에 것들은 가짜 커피나 다름없다며, 큰소리 떵떵 치던 내가, 어느 날 상하이에 개인카페에서 내린 윈난성에서 온 커피를 마시고 나서, 뜨악한 표정과 함께 충격에 휩싸인 꼴이 아마 저 백인들과 같지 않았을까. 마실줄도 모르면서, 에스프레소, 커피원두는 무조건 케이샤지 하며 으스대던 꼴은 아마 20세기가 되어도, 백인 우월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어떤 '... 주의자'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 뜬금없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트에 한 줄을 적자마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뉴스에 대해 들으려 킨 저녁 BBC뉴스에서 영국 모 지방에서 20살 자리 흑인을 약 14년 동안이나 노예처럼 부려먹은 노인여자 및 그 가족에 대해서 나오고 있었다.


가끔 글로 쓰면서도 내 생각들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으면서도, 뭔가 내 주변의 것들과 오묘하게 체인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가끔 무섭다.




앞서 말했듯, 검은 물의 커피가 되기 위해서는 커피 체리라는 열매가 맺혀야 시작된다. 커피열매는 세상밖으로 나와 사람손에 수확될 때 즈음에는 빨갛게 변한다. 원래는 초록이었다가, 서서히 빛깔이 따먹어도 좋을많큼의 발갛게 변해, 나중에는 체리와 같은 색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닉네임이 커피체리라고...

커피열매.jpeg 진짜 체리 같은 커피열매


쓱 지나가다가 귓동냥한 이야기에 따르면, 커피 체리는 키우기 어려운 과일이라고 한다. 물도 많이 들고, 땅도 많이 필요하고, 게다가 사람처럼 일 년에 딱 한번 나온다. 커피값만 열심히 오른다고 투덜투덜 투덜이 스머프였지만, 그 이유가 인간이란 걸 안 이후로 나는 지속가능한 커피에 관한 책표지만 열심히 본다. (표지만.. 읽기로 한지 언제인지...) 나무에 맺힌 커피 체리는 핸드피킹(손으로 수작업, 직접 하나하나 따기)으로 수확되는 게 제일이라 한다. 물, 땅 양분 같은 자원만 많이 드는 게 아니라, 인건비가 하루가 다르게 하늘을 찌르는 이 시대에, 사람손도 많이 탄다.


열심히 키워서 드디어 수확철, 1년에 한 번 나오는 건데, 이 놈의 열매에 가장 많은 수분과 양분을 머금고 있고, 가장 많은 %를 차지학고 있을 과육은, 커피수확 크루에게는 쓸데없다.


겹겹이 쌓여있는 과육을 다 버려낸 체, '커피콩'이라고 불리는 푸르뎅뎅한 씨앗과도 같은 것이 우리가 써먹을 것라는게 나의 호기심을 높였다. 어차피 시커멓게 볶이고 타고, 우려 질 것... 체리색이 대추색과 같은 색이라고 할 때까지도 '아.. 이래서!'라고 했는데, 또 다른 착각이었다.




학원 원장 딸이었던, 부모의 후광에 힘입지 않겠다는 고집불통 하나로, 엄마 아빠가 했던 학원에 발도 들이지 않고, 나는 중학교 때, 당시에는 말이 안 되는 인터넷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전교권에서 노는 애들을 잡기 위해서는, 뭔가 필요했는데, 나는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즈음은 알았다. 그래서 학원, 과외는 안되니까, 인강으로 빠졌다.

운이 너무 좋았다. 당시 중학교의 중간, 기말은 지금 문제들과는 달리, 교과서 자습서만 잘 보면, 나같이 융통성 없는 신경학구조를 가지고 있는 뇌도 어쩔 수 없이(?) 전교권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성적이 잘 나오면 조용한 집안, 조금은 행복해 보이는 엄마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만하게도 항상 반에서 1등을 해야 하고, 전교권에서 놀아, 나중에는 외고를 진학하는 게 나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프림탄 할머니댁의 다방 커피보다 훨씬 맛은 없지만, 화장실에 죽치고 있는 시간도 줄이고, 정신이 더 바짝 드는 블랙커피로 취향을 바꿨다.


그래도 뚫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중2 때 (하필이면 중2)의 같은 반 1등이었다. 그 여자애는 전교 1등이기도 했다. 우리 반에서 1등이면 전교권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더, 왜인지 미련을 놓기가 힘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아이의 벽은 뚫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 했다. 그 아이를 교실 뒤편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찰했다. 내가 조용히 그 아이가 하는 모든 걸 관찰하고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내가 1등이 되고 그이가 2등이 되는 그런 '찰나의 순간'도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항상 반에서 조용하고, 놀 때는 놀고, 급식 먹을 때는 떠들면서 다른 친구들과 노는 저 얌전한 모범생 1등이, 나와 뭐가 다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같은 수업을 듣고, 자습서도 같았다. 학원 안 다니고 과외 안 하고, 인강만 듣는 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 게다가 부모 둘 다 맞벌이라는 점도 같았다. 집안 분위기가 더 화목했을까?


그 아이는 성적이 안 나와도 집에서 혼나거나 맞지는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났나? 나처럼 우악스럽지 않고, 머리도 시끄럽지 않은... 시동이 걸리려면 한참은 있어야 하는 가벼운 엉덩이가 아니라서였나? 그런가 보다, 그거다! 멍청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어나기를... 저렇게......!"

엄마에게 똑같은 말을 나불거리다가, 얻어맞은 매 공공연한 나만의 학창 시절 기억이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알파세대 혹은 젠지세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전교권에서 논다 하는 아이들의 말하는 습관은 사람마다 복붙 한 듯, 항상 같았다. 시험날 혹은 시험 하루 전 '아...! 나 공부하나도 못했어...', '나 어제도 영화 보고 왔잖아, 미쳤지.' '이번엔 완전 바닥이겠네, 바닥 치겠어...' 등을 마치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징징대기.


지겹게 짜증 나는, 이 관행 아닌 관행은 내가 내손으로 자퇴서를 쓸 고등학교 2학년까지 계속되었다. 징글맞은 것들......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던 나는, '와 정말 공부하나도 안 했나 보다.'라고 철떡 같이 그 아이들의 모든 말을 믿었다. 저 꼬락서니 하나라도 안 보니, 자퇴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정도였다.


저 위의 1등 모범생이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 아이는, 조용했다. 저런 교활한 말을 내뱉지 않아도, 이 게임의 결말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깡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느 날 정말 대놓고 '너는 어떻게 공부해? 어떻게 그렇게 1등을 안 놓치냐?' 묻는 어이없는 질문에도, 빤한 얼굴로 나에게 '그냥 예습복습 철저히, 선생님말하는 거 잘 듣고, 놓치지 않는 거지 뭐... 다른 게 있어?'라고 했다. 재수가 없었지만, 그때 느낌표가 머리 위에 섰다.


아니... 교실에서 하는 모습을 안 보인다고, 왜 집에서도 안 할 거라는 착각을 했던 걸까?


내 나이 23, 리포트를 쓰기 위해 카페에 큰 노트북과 충전기를 들고 구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학기에만 나타나는 집중력저하증(?)을 앓고 있던 나는 이 상하이 럭셔리 수재들 사이에서 뭐 한다고 여기 이러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어쩌다 덜 말려지고 덜 볶여, 사회에 던져진 생맛 그대로의 콩인가, 이러다가는 어디 쓰이지도 못하고 썩겠네..."

이런저런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표면적인 언행에 빠져들어 정작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휘청휘청,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볶여, 포장까지 말끔하게 사회에 나온 반면, 나는 어쩐지 이곳에 갈까 저곳에 갈까 흔들리기 바빠, 몇 시간 동안 볶이면 되는 그 간단한 일도 못하는 덜떨어진 물건 같았다.


, 대학교내 한국인들을 사귀어 술자리도 나가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나 혼자 왕따처럼 특공대(?)로 살다 조용히 졸업해야 하나, 혹은 싱가포르유학생들처럼 돈도 있고 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아이들의 시녀처럼 쫓아다니기라도 해야 하는지... 매일매일이 시끄럽고, 과부하의 뇌에 힘들어 눈물바람이었던 학교생활이었다.


매일매일 눈치싸움이었다. 싱가포르아이들은 왜인지 항상 2개 국어는 기본이었고, 성적은 탑 3에 오르지 않으면 말이 안 되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본인들이 모르고 마셔대던 커피와 비슷하게, 크레마가 잔뜩 올라가 있는 작은 커피잔에 에스프레소 같은 아이들이었다. 항상 에스프레소 시켜놓고, 아이스에 물도 잔뜩 따로 시켰지만.


뭐가 별로 없어 보이는, 총역사도 몇백 년 안 되는 작은 나라에서 왔지만, 항상 겉은 있어 보이고... 그냥 있어 보이는 아이들. 그래서 항상 어떻게든 같이 있으려 했다.

수강 신청이 정말 피 말리는 클릭의 싸움이었는데, 어느 날, 재앙이 떴다. 그들과 다른 교양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싱가포르 유학생 선배가 성적 받기 최고라며 추천해 준 교양수업에, 나만 똑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한국, 싱가포르, 심지어 그 많은 일본 유학생도 한 명 없는 마케팅 관련 수업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원망은 하면 할수록 쓸데없고, 속만 싸하게 아프다. 어떻게든 그들이 내가 원하던 교양과목에서 A를 받게 된다면, 나도 적어도 B+정도는 받아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꼴에 아주 아주 지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그 수업은 리포트 10000자가 곧 기말시험이었다. 성적 B이상은 무조건 받아내야겠다는 일념하나로, 마실줄도 몰랐던 투샷, 쓰리샷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까지 속에 원샷으로 집어넣고, 손을 벌벌 떨며, 견뎠다.

남들과는 다른 주제, 다른 관점을 넣어야, 한국인 유학생 (놀기 좋아하는,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넘겨,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십여 년 전에는, 지속가능함, 에코 프렌들리 (Eco Friendly),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와 같은 주제들이 막 싹을 피우기 시작했던 때였다. 커피가 상당히 자원을 많이 잡아먹어, 어떻게든 지속가능한 커피를 키워야, 업계가 산다 등 같은 주제를 많이 본 적이 있어, 우리가 가장 럭셔리하다고 생각하는 사치품, 명품업계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주제가 정해졌다.

짧게 그 당시 나의 10000자짜리 보고서를 요약하자면, 명품업계의 브랜드들은 하는 것도 없이, 투자사, 투자인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ESG, CSR(Corp. social responsibility) 단어를 잔뜩 보고서에 넣어, 하는 둥 마는둥한 전략을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눈속임을 하고 있다, 예시는 이러하다 등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난생처음, (졸업포함) 10000자 자리 나의 마케팅 교양수업 보고서는 A를 받았고, 교수가 A+을 주고팠지만, 최고점이 A라서 그걸 줬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해피엔딩이면 좋으련만, 그 이후, 나는 커피에 '커'자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한창 카페인을 너무 많이 들이부어, 불면증, 수전증 등부터, 피부 뒤집어짐, 변비와 설사 오락가락이 나의 학기 내 증상이었다.


그래도, 그 학기 기말이 끝난 후, 쑥 올라버린 나의 GPA 점수를 보며, 한창 볼품없는 커피체리에서, 어떻게 생두를 거쳐 로스팅까지는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감정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 학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어째 나보다 당시 싱가포르 친구들이 더 놀래했다. 내 보고서를 좀 봐도 되냐고, 나도 좀 참고하고 싶다고 했다.

한창 같으면, '오우 당연하지!' 하며 비즈니스 미소를 뗬을 테지만, 나를 책가방에 달고 다니는, 인형 고리처럼 취급했던 기분이 생각나, 단호하게 '미안, 별로 보여주고 싶진 않다...'라고 했다.


세상이 공평하다는 생각은 버렸다.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아이들도 '외국인 유학생'들 이라면서 유학생 태그를 달고 다니며,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외국인 취급을 받는 거겠지.

보여달라고 하며 나에게 정정당당히 요구하는 그들 얼굴에, "그래도, 세상은 공평해야 되는 거 아냐!" 하는 내 얼굴이 은은히 비쳤다. 그리고 나는 '응 미안, 아냐.'라고 대꾸했다. 난생처음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그때 카페인에 체한(?) 느낌이 미미하게 목구멍에 남은 느낌이라, 커피보다는 중국 나이차 (밀크티)에 보바를 잔뜩 먹어, 살이 10킬로나 쪘다.

결국 그거 빼느라고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헬스장에서 열심히 굴렀지만.


지금, 나는 아직도, 여행을 갈 때도, 그냥 런던에 놀러 갈 때에도, 남편이 혹시나 시카고 출장을 갈 때도 무조건, 근처 원두 로스터리점이나, 원두를 파는 카페에 들러, 꼭 한봉다리씩 손에 들고 온다. 남편은 이것 때문에 수화물 오버차지 (overcharge) 나오면 너 때문이라며, 투정을 부리지만, 나는 그럼 내 월급에서 까라고 배를 짼다(?).


커피는 이제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하루의 의식이다. 명상이다. 커피를 냄새를 맡아보고, 그걸 분쇄기에 넣고 갈아가면서, 한 번 더 커피가루를 손으로 만져본다. 하리오 필터기에 필터종이를 올려, 린싱을 조용히 하고, 물을 버려, 바로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한다. 타이머 체크, 커피 그램수, 물 그램수 체크, 그리고 케틀에 조용히 맞춰둔 온도에 끓여지고 있는 물을 바라보고, 포트를 빼내어 천천히 커피를 내린다


처음 내려질 때, 올라오는 가스와, 똥그란 빵처럼 부푸는 커피가루 그리고, 유리잔에 팅팅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오는 커피물은, 오늘 하루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 커피가 잘 내려져도 안 내려져도, 맛이 있어도, 떫어도, 너무 셔도, 그날 하루 그 커피 한잔만 있으면, 나는 모든 게 괜찮다고... 그럻게 하루를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커피는 나에게 징크스나, 이상한 강박증을 가져다준 적이 없다. 물통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나는, 물통에 온수와 냉수를 섞어, 첫 모금을 마셨을 때 너무 뜨겁거나, 너무 맹맹하면, 그날하루는 종 쳤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프로틴 셰이크를 만들 때, 셰이크 병의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액체가 손에 묻고 이리저리 튀면, 그 또한, 불운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똑같은 아침시간의, 내 몸에 들어가는 액체들인데도, 커피만큼은 잘 내려졌다 안 내려졌다에 내 하루의 주파수를 맞추지 않는다. 뭔가 이론적으로는 설명 안 되는 나와 커피의 궁합이려나.


커피는 내가 생후 7살 때부터 한시도 내 옆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나의 기호 식품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진하게 프림까지 슥슥 너 가며 조그만 커피잔에 타주시던 다방커피부터, 카페에서 갓 내린 에스프레소, 그리고 핸드드립에서 푸어오버, 에어프레스, 모카커피, 달달한 스페인 그리고 베트남 연유커피까지 등등, 이 모든 것이 내 몸에 이곳저곳에 놓여있다.


이 나이 즈음이면, 나도 웬만한 바리스타만큼은 아니어도, 팬시한 고급 카페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푸어오버 기계만큼은 내려야 할 텐데도, 내 손으로 내리는 푸어오버 커피는 매일, 매 순간 맛이 다르다.


같은 커피콩에 매일 다른 향과, 다른 맛의 커피라니.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일까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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