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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Apr 08. 2023

홀로 섬살이 [4주 차]

비에 덜 씻긴 꽃가루와 황사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분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었는지, 주중엔 계속 흐리거나 비바람이 몰아쳤다.

아침 출근길에 거쳐가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모래 바람이 불어와 눈에 큰 먼지가 들어갔다.

날씨가 저기압이어서인지 피로 누적이 시작되는 건지 몸이 무거워 자전거가 외려 짐 같아 걸어 다녔다.


감기 기운이 엄습했다.

밖에 혼자 나와 살 때 아프면 곤란하다.

자취 경력이 오래되다 보니 서러울 단계는 진즉에 지났고

내가 끙끙 앓느라 뭘 못 하게 되면 나를 챙길 사람이 없다는 것.

크게 대단한 걸 놓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아침에 잠에서 깨지 못해 알람을 무시하고 자게 되면 깨워줄 엄마의 부재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감기가 찾아오려 할 때 심해지지 않도록 잘 방어해야 한다.


추운 데 온종일 서있으면서 주말 근무를 했더니

한 주 안 갔을 뿐인 데도 집이 고팠다.

금요일 밤 바삐 본가에 갔다가 일요일 낮 돌아온 후 잘 먹고 잘 잤는데도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이 갈라지는 듯이 통증이 있었고 좀 있으면 콧물도 날 것 같았다.


근무 중에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가려했더니

내과든 이비인후과든 빠르게 걸어갔다 올 거리는 아니었고 의원도 마땅치 않았다.

한 곳에 전화를 하니 한 시간 반 대기해야 한단다.

애당초 포기를 해버리고 비바람을 뚫고 점심시간에 가까운 약국을 찾았다.

한약 성분으로 된 알약과 마시는 약을 사들고 이십 분이나 점심시간이 남았기에 회사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산책 치고는 여유 없는 바쁜 걸음으로 회사 건물을 끼고 바깥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식후 약을 두 번 챙겨 먹었다.

뿌리 뽑듯 깨끗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더 심해지지도 않아 다행인 정도였다.


사무실 내 자리에서 내다본 창 밖은 여름철 태풍 부는 날씨 보듯 정신이 없다.

"저 야자수 뽑히는 것 아니에요?"

회사 앞마당에 이파리들이 정신없이 나부낀다. 덩달아 나도 산만하다.

웃으며 나누는 대화지만 실상은 창문이 깨져도 집에는 안 보내준다.

불안한 유리창을 보수 공사할 일은 더더구나 없다.


회사 일은 조급한 맘과 달리 더디다.

매일 조금씩 배우는 것들은 생기지만 실전에 써먹을 기회는 아직 주어지지 않고 있고,

여러 사람들과 협업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책임자는 나인데

아직 사람들과 알아가지 못한 채로 일을 하려니 내 마음만큼 따라와 주지 않아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아직 본격적으로 뭔가 시작한 것도 아닌데 혼자 호들갑 떠는 것도 오버스러워 보일 듯해

고민은 고민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뭔가 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하고 하지만 아직 때는 아니고, 속도 조절을 해야겠다 싶다.


감기가 똑 떨어지지 않은 지 사흘째, 이름도 따스한 그 약국엘 다시 찾았다.

그날 사갔던 약을 얘기하며 다 먹어봤지만 목이 찢어지는 느낌이 여전하다고 설명했더니

내 증상을 세세하게 물어보고는 짜 먹는 인후통 약과 콧물 증상에 먹는 알약을 줬다.

요일별로 교대근무를 하는지 이번엔 다른 약사였다.

젊은데 포근한 엄마 같은 사람이 가운을 입고 나와서 나한테 질문을 수차례 해대니 그냥 좋았다.

비 오는 날 모든 게 차가운데 약국 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이템을 고르고 그에 맞는 취재원을 찾고 섭외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인물을 다루는 편이라면 그 인물 자체가 아이템인 경우가 된다.

내가 아이템을 제안하면 작가는 관련 자료를 찾아본 후 섭외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가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원 섭외까지 직접 했다.

적당한 인물을 찾긴 찾았는데 연락할 방법이 SNS 뿐이어서 메시지를 보낸 후 무작정 기다렸다.

하루를 꼬박 기다려 다음날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 사이 밤엔 꿈도 전혀 안 꾸는 내가 거절 메시지를 받는 꿈을 꿨다.


섬에 도망치듯 들어온 지 4주 차가 되는 토요일엔 <2023 제주 북 페어>가 열렸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일정 없이 맞는 텅 빈 토요일 아침,

오늘은 꼭 병원에 가고 싶은데.

목은 여전히 찢어질 듯 아프고 코맹맹이 소리가 날 정도로 목감기는 코감기로 전해졌다.

자취방에서는 가장 가까운 이비인후과도 20분 이상 걸어가야 했다.

차라리 북 페어가 열리는 한라체육관 근처 병원을 검색해 바삐 길을 나섰다.


잰걸음으로 집을 나서니 아차 싶었다.

분명 아까 생각했는데.

'오늘은… 종이랑 병 버리는 날이네.'

한 번도 내다 버리지 않은 재활용 쓰레기를 보면서

오늘은 주말답게 한 번은 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종이와 병을 큰 봉지에 쑤셔 넣었더랬다.


근데 여기 공기가 이렇게 좋았나.

충분히 자고 나서는 걸음과 오랜만에 쬐는 햇볕이 싱그러웠다.


병원을 갔는데 소파엔 환자들로 빽빽하고

감기 유행철인지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오전 열 시밖에 안 됐는데 접수 마감이었다.


근처 도보 십분 거리에 있는 다른 이비인후과를 찾아 전화했더니

지금 진료가 가능하다 했다.

햇빛을 북 페어 팸플릿으로 가리면서 또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제주가 직사광선이 강하긴 한가 보다.

적도와 가까우면 얼마나 가깝다고, 비타민D 합성만 생각하며 방심했다가 기미가 잔뜩 생겨버렸다.


오래된 건물 2층에 있는 이비인후과.

건너편에 지도 앱에는 나오지 않은 또 다른 이비인후과가 보였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원래 가기로 한 데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접수창구부터 굉장히 오래된 게 눈에 띄었다.

내가 어릴 때도 오래된 인테리어라고 느꼈던 그런 자잘한 타일이 붙어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어릴 때부터 이비인후과는 자주 다녔던 지라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다란 장비로 코를 찔러 목구멍까지 닿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끼고 있었다.

코가 시려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원래도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걸로 보이는데요?"

한참 코를 무자비하게 찌른 후 나이 지긋한 의사가 물었다.


감기와 함께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비염이 다시 증상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옮기지 않은 내 주소지를 보더니 의사가 또 물었다.

"제주엔 여행 오신 거예요?"

"아, 살고 있어요. 주소를 안 옮겨서요."

"여기서 좀 더 비염이 심하지 않던가요? 눈이 간질간질하다거나?"

"음… 그런 것 같네요. 왜 그런 건가요?"

"제주에 꽃가루가 많아요. 그리고 서해안과 가까워서 황사도 심하고요."

"그럼 마스크를 평소에도 쓰는 게 도움이 되겠네요?"


사무실에서 나 혼자 마스크 쓰고 있다고 한 마디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지.


같은 건물 1층에는 똑같이 오래된 약국이 있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에서 약을 탔다.

약사는 이비인후과 의사보다도 열 살 이상 많아 보였는데,

잘은 알약을 일일이 짚어가며 이건 졸릴 수 있는 약이고 저건 위장을 보호하는 약이라고 설명해 주는 게 좋았다.


북 페어 개장할 때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바쁘게 한라체육관으로 걸어갔다.

물이 다 말라버린 하천가로 걷는데 경로당이 보였고 '책 마을'이라는 글자도 쓰여있었다.

여긴 책과 일가견이 있는 곳인가, 생각하며 벌써부터 차가 막히는 체육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막아선 형광조끼 진행요원들과 몇몇 일찍 온 사람들이 있었다.

공복인데도 괜찮았다.

먼저 안에 들어가 보고 싶어 진행요원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준비 중인 참가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무료 커피를 제공하는 바리스타학원에서는 분주하게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 향이 참 좋았다.

빈 속에 커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커피를 받고 싶어 텀블러를 꺼내 줄을 섰다.

오며 가며 보이는 사람들이 다들 초식 동물 같아 약간의 친밀감을 느꼈다.

책을 좋아하는 순하고 궁금증 많은 사람들.


2023 제주 북 페어 이야기는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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