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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Mar 31. 2023

홀로 섬살이 [3주 차]

내 천장 아래 잠들고 내 바퀴 위로 굴러간다

섬 생활 3주 차.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간의 일을 정리해본다.


뭍에서 섬으로 넘어오기 전 이삿짐센터에서 쓰는 파란 단프라 박스에다 짐을 싸놨더랬다.

오랜 프로봇짐꾼이자 방랑러로서, 짐 싸는 일은 참 새로울 것 없이 한결같이 지겹다.

어렵지 않게 필수품만 간단히 챙겼고 그래도 요와 이불, 베개, 어릴 적부터 갖고 자는 노란 수건을 넣으니 두 상자가 가득 찼다.


그런 후 갈 때가 돼 기내용 캐리어 하나와 백팩을 무겁게 채워 섬으로 넘어왔다.

인터넷에 올라온 오피스텔이나 연립주택은 대체로 허위매물이다.

십분 전 게시된 매물을 보고 부동산에 전화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다.

"그 방은 없고요, 그 옆에 다른 방 있어요. 가격은 같아요."

허위매물인 줄 알면서도 방 내부 구조며 옵션을 외울 때까지 일주일이 넘도록 방을 알아봤다.

동네 소식,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네이버 카페도 가입해 매일 둘러봤다.


부동산에 대한 놀랍지도 않은 실망감과 정처 없이 생활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뾰족한 수 없이 일단은 무작정 섬으로 향했다.

3주 전 이틀밤 묵었던 관광호텔로 갔다. 시설이 한 삼십 년은 된 것처럼 보였다.

그 호텔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무식이 용감인 채로 무턱대고 섬으로 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주차장에 렌터카가 많다. 의외로 고급 외제차도 몇몇 보인다.

그래도 주차장은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주차장 가에 심긴 야자나무도 내 또래 부모님네 세대가 신혼여행 가서 찍어온 사진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바로 그 나무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 번잡스럽고 지저분한 동네에 유일하게 그 관광호텔이 시간이 멈춘 장소 같아 보여 좋았다.

그 당시엔 꽤나 호화로운 시설이었겠다 싶은 고택의 여유가 내 쪼들리는 마음도 여유롭게 해줬다.

당연히 한 집 건너 호텔인 동네에 이 낡은 관광호텔은 아주 저렴한 편이었다.

가격 낮은 순으로 알아보다가 얻어걸린 곳이었다.



카드 키가 아닌 긴 호텔 이름이 새겨진 열쇠를 받아 들고 들어간 방은 매우 낡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다 갖췄고 무엇보다 넓었다.

호텔 앱 리뷰에서 이용객 중 누군가는 '곱게 늙은 할머니 같은 호텔'이라고 썼다.

옛날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정갈하고 깔끔했으며 오랫동안 잘 관리한 곳 같았다.

3인실을 줘서 가져온 짐도 다 풀어헤쳐놓고 손빨래도 해 널어놓으면서

내 것 하나 없는 이 섬에서 오롯한 내 공간인 양 지냈다.


일주일 호텔살이가 심리적으로 의지됐던 것 같다.

정들어 내 집같이 느껴질 무렵 오피스텔을 겨우 구했다.

그 사이 주말에 본가에 한 번 다녀갔다 왔고 캐리어와 백팩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무리 짐을 가져와도 또 필요한 게 있다.

주말이 끝나던 밤 오피스텔에 입주해 자취를 시작했다.


현관문 앞에 파란 상자 두 개가 먼저 와있는 게 보였다.

괜히 안심이 됐다.

'너희 우리 집에서 왔구나.'


섬이라 습한 건가 날이 흐려 그런 건가, 바닥에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실내 건조하는 빨래에 습한 냄새가 배진 않을지, 옷장에 건 옷이 눅눅해지진 않을지 지레 먼저 골치가 아팠다.


'아, 또 시작이구나.'

전에 살던 세입자가 놓고 간 수건을 방바닥에 놓고 발로 슥슥 대강 밀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물 먹는 하마에 물이 차지 않은 걸 보면 건조한 날도 있겠지 위안 삼았다.




대중교통이 있다고는 하나, 너른 섬에서 어쩔 수 없을 땐 운전이 필요할까 봐

장롱 속 감춰놨던 운전면허를 꺼내 들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속성 연습을 며칠간 했다.

며칠을 연달아 연습해서 용기가 좀 생기는 듯하더니, 섬에 들어온 후엔 또 할 수 있을까 싶은 심정이다.

본가에 갈 때마다 틈틈이 연습을 하려 한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갑자기 한정된 시간 안에 어디를 가야 하는 경우가 제일 불안하다.



일단은 자가용 대신 중고 자전거를 한 대 마련해 출퇴근길에 요긴하게 탄다.


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수리센터를 이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봤는데,

섬에 도착하면 한 번 가보고 싶었더랬다.

가기 전 먼저 전화를 했더니 나와있는 자전거가 몇 대 있다고 했다.


며칠 후 주말에 가 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저씨 두 분은 자전거를 고치느라 눈길도 주지 않으셨는데,

내 앞에 온 두 사람 자전거를 먼저 열심히 뚝딱뚝딱 고쳐주시고는 나한테도 자전거를 끌고 들어와보라셨다.

"아, 아뇨. 저는 고치러 온 거 아니고요. 사러 온 거예요. 며칠 전에 전화드린..."


쿨하게 "보세요." 하시고는 두 분은 또 각자 할 일을 분주히 하셨다.

같은 사양의 자전거 두 대에 똑같은 가격표가 붙어있었고,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조립 제품이기 때문에 모양이나 프레임 색이 조금씩 달랐다.

한 대는 안장에 비닐이 씌워져 있고 한 대는 없어서 이왕이면 비닐이 씌워진 자전거를 골라 한 번 타보겠다고 했다.


뭐 재고 따질 게 없었다.

브레이크가 양쪽 다 잘 잡히기에 문제없겠다 싶어

바로 돈을 건네고 자물쇠도 하나 사서 벚꽃이 만개한 초행길을 타다가 끌다가 하길 반복했다.



벚꽃 축제가 한창인 주말이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가 대다수였다.

렌터카가 많아 자전거로 쭉 나아가질 못했다.

조금 타다 갓길에 멈추기를 반복했는데 오르막길이 어찌 그리 많은지 걷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고 다리는 터질 것 같았다.

지도 앱이 인도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차는 많은 길을 가르쳐줬다.

드라이브 온 사람들, 여행 온 사람들로 붐볐는데, 나는 그럴수록 공허했다.


자전거는 뼈대도, 바퀴도, 핸들도, 기어도 낡았지만 딱 제 기능만큼은 한다.

하물며 벨도 헐거워 턱 하나 넘으면 그 진동에 저절로 벨소리가 난다.

온전치 못한 자전거에서 모은 멀쩡한 부품을 더하고 더해 한 대의 새 이동수단이 된 게 괜히 좋았다.

내 20대 같다고 생각하면 너무 감상적인가, 떠올리며 비상구 텅 빈 공간에 몰래 주차했다.

여기 계속 세워놔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안장에 씌워져 있던 요식행위 같은 비닐은 왠지 벗겨내기 싫어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동여매놨다.

언제라도 이 자전거를 또 중고로 다시 팔 수도, 내가 짐을 정리할 수도,

어떤 변수가 생겨 떠날 수도 있다는 나만의 은밀하지만 공개적인 표식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당장 올해 안에 어딘가로 떠날 일은 웬만해선 없겠지만,

그냥 나한테 숨구멍 하나쯤 남겨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선 환경에 홀로 떨어져 나와

낯선 사람들과, 낯선 일을 하며 지내보고 있다.


다행히도 그간 겪어본 경험에 빗댔을 때 최악은 아니다.

늘 그렇듯이 다른 건 이상하리만치 잘 돌아간다.

나만 잘 굴러가면 된다, 나만.


홀로 섬을 살고 있던 내가,

진짜 홀로 섬에 왔다.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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