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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Mar 29. 2023

분에 넘칠 만큼 무해하던 행복은 부지런히 추억하자

바닷바람이 몹시 불던 날

생의 언덕을 넘고 있는 이들이나, 천천히 하산하는 이들에게는 같잖은 말일지 모르겠으나

난 언제부턴가 다시는 이전의 행복이란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용무가 있어 사흘 간 제주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제주를 찾았을 때 가본 곳을 이번 일정과는 별개로 다시 들르게 됐다.

지지난해 말 제주를 찾았을 때 처음으로 여행객의 방문지가 아닌 도민이 다니는 길로 돌아다녀봤다.

대학가, 공공도서관, 중학교, 그리고 대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크고 자리 많은 카페.


처음 그곳을 갔을 때 아침 일찍 방문했던 걸 보람있게 여겼더랬다.

아직 여덟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겨울이어서 해가 쨍하니 비치지 않는 어슴푸레한 때였다.

아침 일곱 시면 여는 카페였는데, 아침 시간에는 모닝 커피를 싸게 내놨고 베이글이나 샐러드 등 아침 요깃거리도 다양하게 팔았다.


그때 앉았던 자리에 시선을 둔 채 볕이 잘 드는 곳으로 더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너른 원목 탁자는 2인용이었지만 빈 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독점하게 됐다.

네 시간여를 머물렀고, 오른쪽 얼굴이 땃땃하게 익었다 싶었는데 그늘이 지니 어느새 또 춥기도 했다.

그동안 학생들은 소파에 누워 자기도 하고 대체로 삼삼오오 모여 전공 서적과 노트북을 펼쳐놓고 공부나 과제를 했다.

그 외에 어른들도 보였는데 주민들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제주어가 들렸다.


오후 네 시.

카페를 나섰다.

끝없는 내리막이 보이는 이 길.

그 길을 보면서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 바닷가로 가는 길을 닮았다는 외적 감상과 함께,

처음 이 길을 보던 날이 무해한 행복이 끝나던 날이구나.


국내여행을 내게 알려준 사람이 있다.



부모님은 일과 근검절약, 성실과 정직의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더는 일에 시간을 쫓기거나 저축만이 답이 아니던 때에도 생활반경을 벗어날 줄 모르셨다.

그 영향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스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스물셋 봄학기 마지막 수업이 종강하던 날, 숙소만 잡고 무작정 떠났던 제주 홀로 여행이 스스로 결정한 첫 여행이었다.

국내여행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간 이국적인 섬이었으므로 딱히 국내여행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 이후론 제주를 빼곤 여행이란 것은 외국을 가야만 여행인 줄 알았다.


내게 국내여행을 가르쳐준 사람은 어느 지역에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낯선 곳에서 조회가 어려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 같은 교통편은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지역마다 뭘 보고 와야 하는지 다 가르쳐줬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해서 전국에서 대도시를 비롯해서 택시를 부르기 어려운 자그마한 마을까지, 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좋아서, 의미 있어서, 물건을 놓고 와서 같은 곳을 두 번 간 적도 있다.


다시 찾은 그 카페 앞에서 큰 길을 따라 시선을 멈추면 바다가 보인다.

10~15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나올 것처럼 눈 앞에서 찰랑거린다.

그땐 바다까지 못 걸어갔는데, 이번에는 가고 싶었다.

10분 걸었는데 제자리였다.

신기루같은 걸까, 지도 앱에선 아직 45분은 더 걸어야 한단다.


이호테우 해변이 나오려했다.

마지막으로 온 게 2021년 겨울, 볼 일이 있어서였고,

그 전에 여행으로서 마지막으로 온 건 2020년 여름이었다.

그 여름이 아프게 떠올랐다.

차마 가던 길로 못 가겠어서 좁은 골목길로라도 방향을 틀어야 했다.


제주는 인도의 연석에도 현무암이 섞여 왠지 피로감이 적었다.

도두동 주민센터 표지판이 보이자 다시 바다가 보였다.

건물 바로 위로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들이 착륙을 하려 했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도 경로가 길어지니 지쳐서 택시 앱을 켰다.

기본요금 정도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주저없이 불렀다.


드디어 도두항이네, 바다는 보고 싶었고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처음 가는 곳이어야 했다.

아차. 도착 1분도 남기지 않고 또 낯이 익었다.

비행 전 마지막 식사를 한 곳이었다.

눈길을 서둘러 거두고는 목적지에 다다라 내릴 준비를 했다.


"기사님, 돌지 않고 여기 맞은편에 세워주셔도 돼요."

택시 기사님은 도착지로 지정된 식당 앞에 친절히 세워주셨는데

나는 목이 메어 좀 걸었다.

백사장도 없고 자갈밭도 없어 볼 게 없었음에도 물과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좀 더 바다에 가까이 둑에 올라서니 이호테우를 상징하는 빨갛고 하얀 말들이 눈 앞에 보여서 허무했다.

방파제 속에서 속삭이는 듯 들리는 파도 소리가 애처로웠다.

너네를 피해 걷다가 또 걷다가 택시까지 타고 도망왔는데,

굽은 항구와 해변은 거의 마주보듯 가까이 놓여 있어 돌아와도 그 자리였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혼자 들어간 식당에서 외국인 종업원에게 검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는

먼저 식사하고 있는 네 사람 옆에 가 붙은 4인용 테이블에 씩씩하게 앉았다.

1인 관광객 티내듯 끄트머리 구석 자리에 앉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에 숨고 싶었던 것 같다.


식사를 하고 돌아나오는데 버스가 17분 후 도착한다고 떴다.

정류장까지는 꽤 걸어야 했으므로 서둘러 걷는데 하필 그 정류장이 마지막으로 여행을 왔을 때 식사했던 그곳 앞이고

마치 그날처럼 생생하게 그 동네가 기억났다.


걸음이 빨랐는지 버스가 오려면 한참 멀었고

두리번대는데 화려한 카페가 하나 보이고 같은 건물에 심리상담센터가 보였다.

카페는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놀랍게도 평이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가볼까...?'

그러다 시선이 옮겨갔다.

'근데 심리상담센터는 왜 열려있지?

아, 오늘 평일이지.

마칠 시간인데?'

찾아보니 오후 7시 반까지는 운영한다고 했다.


버스를 보내고 저 카페에 갈까, 몇 분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저 신비로운 건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었는지도.

추적이 필요한 우울증이 아니라 내가 더 잘 아는 내 상태지만

그냥 뭐라도 붙잡고 싶고 세상이 무너져내려 내 위로 쏟아져내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저 카페를 핑계 삼아 이 마을에, 저 건물에, 저 센터에 한 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런 어설픈 계획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이번 제주행도 그렇고, 어느 지역을 가든 마음이 아리다.

구석구석 다녀보면 안 가본 곳이 더 많겠지만, 야속하게도 갔던 동네만 보인다.


수많은 여행지 중 하나였던 제주를 다시 홀로 오며

시간도, 내 모습도, 내 눈에 비친 세상도 모든 게 바뀌었지만

내가 고작 한 번 다녀갔던 곳들이 다시 생생하게 기억에 나면서

그때 과연 나는 내 분수에 넘치는 한 톨의 먼지도 묻지 않은 무해한 행복에 휩싸였더랬구나, 하고 생각하며

머리가 띵해지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 새하얀 행복을 남은 생에 자주, 정성껏 추억하는 게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육지에서 온 내게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바닷바람이 거셌고 찼다.

그리움은 어떤 식으로도 옅어지지 않나 보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

예상치 못했던 섬 생활이 시작됐다.

정말 혼자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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