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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Apr 23. 2023

홀로 섬살이 [6주 차]

미치다

그래도 촬영은 어떻게 마무리됐다.

우여곡절이 있어 걱정을 많이 했고 마음도 힘들었지만 늘 그렇듯이 지나고 나면 못 할 것 같더니 어떻게 어떻게 지나갔네, 하며 한시름 놓는다.

걱정이 됐으므로 대비하고 긴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결코 기우는 아니었다.

먹구름도 한 곳에 머무는 게 아니니 바람에 떠밀려가고 해가 나면

곧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궂은 날씨는 잊게 된다.


그렇게 지난주 촬영을 나갔다 온 후부터는 일에 미쳐있었는데,

그게 나도 모르게 일에 미쳐서 미친 게 아니라

불안하고 초조할 때 나 홀로 뭘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렇게 미칠 에야 일에 미치는 편이 속 편하겠다고

무의식 중에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몸은 힘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정말 몸이 힘들게 일했던 때와 비교하면

나름대로 몸을 알뜰히 챙겨가며 일했고, 잠이 부족해 피곤한 것 외에는 특별히 건강에 적신호가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스쾃 100개 하고 잠자리에 드는 버릇도 가장 바쁜 시기에 들이기 시작했다.


촬영이 이제 한 고개 넘은 셈이라면 촬영을 다녀와 1차 편집, 2차 편집을 하고 나면 어느 정도 정상이 보일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끝이 나지 않았다.

결국은 방영날까지 신경을 쓰고 붙들어 매야 하는구나 하는 걸 또 배웠다.

편집이 다 되고 나서는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 작업은 시간을 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자막을 다듬고 효과를 넣고 모자이크 안 친 데는 없는가 보고 오디오를 맞췄다.


매일 퇴근이 늦었다.

빠르면 저녁을 거른 채 8시,

후다닥 점심 메뉴와 똑같은 저녁 급식을 먹고 돌아와 작업하면 9시, 10시.

밤늦은 시간 홀로 어둠 속을 가로등에 의지해 걸어갈 때 낯선 사람이 따라올까 봐 무섭다거나

떨어진 기온 탓에 춥다거나, 외롭다거나 그런 어떤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집에 가 무얼 생각해 놓고 자야 할지, 준비해 가방에 넣어놔야 할지,

그런 생각만 했다.

잠들 때도 아무리 잠이 와도 내일 뭘 해봐야겠다 하고 뭔가 검색해 보고 자곤 했다.

그래서 눈이 뻑뻑하고 눈꺼풀이 무거워도 정신은 말짱했다.


내 딴엔 발버둥 치는 거였다.

내가 왜 여기 와있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내가 일하는 걸 그가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와 상의를 했더라면 걱정이 덜했을 텐데.

다른 건 생각 말고, 일이나 하자.

잡생각이 들기 전에.


그냥 그랬다.

일만 생각하고 또 생각할수록 일은 잘 됐다.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 빼고 모든 시간을 일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기본은 할지, 부족하면 안 되는데,

이번주엔 며칠을 초과근무를 해야 시간 안에 다 끝낼지 계산하는 게 지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는 중에도 회사가 배경인 꿈을 꿨으니,

통 꿈을 꾸지 않는 내가 꿈을 꾸는 족족 회사 꿈만 꿨다 하면 말 다 한 거다.


그런데 많이 힘들었다.

일에만 빠져있는 듯했지만

틈틈이 생각이 났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줄 알면 그가 정말 기뻐할 텐데.


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1등을 거머쥐는 애보다

여유 다 부리면서 타고난 머리로 2, 3등 하는 게

더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던지라

부끄럽게도 열심히 한 게 그리 많지 않다.

본디 성실한 편이긴 하지만 뭔가를 계획된 목표치까지 채워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다.


'일이 처음이라 잘 몰라요.'가 통하는 나이나 경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수능란해 보자니 방송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었기에

눈치코치 가동을 부지런히 해야 했다.


잘하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기보다는,

신입에게는 다소 무리 있던 업무를

계획대로 차질 없이 해내는 걸 보이고 싶었다.


편집은 끝났지만 출연이 남아있었다.

발로 뛰는 PD 콘셉트로 직접 출연을 하기로 돼있었고

굳이  코너의 간판 리포터 대신 PD가 출연하는 이유가 필요하겠어서

나만 할 수 있는 말과 나를 소개할 짧은 노래를 준비해 갔다.

어쭙잖게 출연해서 왜 리포터를 내세우지 않았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보단

알차고 재미있게 해서 제작진부터 설득됐으면 했다.

결과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내레이션도 마치고 나니 좀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생일이기도 했고 3주 간 집에 못 가서

캐리어를 끌고 바삐 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 잠도 안 자고 나를 기다리며

나물을 하고 고기를 구웠을 엄마는

오래 서있어 그날 밤 다리가 저리다고 했다.


계속 긴장을 하고 일만 삶의 중심에 두고 지냈던지라 집에 와서 느끼는 편안함이 반갑고 조금은 낯설 지경이었다.

쉬어도 피로는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지치고 여유를 잃었던 마음은 또 회복받았다.

즐기기 무섭게 또 갈 시간이 됐고

참 주말은 빠르고 야속하단 생각을 한다.


일로 얻는 성취감과 가족과 느끼는 편안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때가 올까.

마음의 여유는 전혀 없었지만 결론은

다행히 차질 없이 방송이 돼서

앞으로도 같은 포맷의 방송을 계속 제작하게 됐다.

미쳤더니 되더라는 걸 너무 늦은 나이에 실감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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