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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Apr 30. 2023

홀로 섬살이 [7주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기 전, 전 직장 동료 두 명과 갔던 전주의 독립서점에서 샀던 책 제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책방들이 삼삼오오 뜻을 모아 코로나19 시국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문학상을 처음 열어

몇 편의 수상작과 각각의 작가 인터뷰를 수록한 책이었다.

맨 앞 순서인 대상작을 한두 장 읽다 내팽개쳐뒀는데, 주말에 본가에 가 챙겨 들고 섬으로 들어왔다.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왠지 이번에는 책을 들고 가면 다 읽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었다.


독립서점도, 독립출판도, 스스로 작가가 되는 사람도 많아지는 추세다.

인디 감성의 일종으로 여겨 관심을 갖곤 했는데, 어느새 전국적으로 파이가 커진 것 같다.

이제는 누런 종이에 인쇄한 얇고 작은 그 독립서적들이 신선하지 않아 오히려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달 초 제주 북 페어에 다녀온 이후 한 보따리 독립서적이 생겼다.

막상 가서 보니 영감을 얻을 만한 책이 많아 보였고

내 눈으로 직접 책을 보고 작가를 만난 이상 눈에 들어온 책은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 날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나는 지나가는 길에 가까운 독립서점을 찾아 책을 한 권 샀다.

나와는 아무 관련 없었지만, 왠지 정서적으로 연결될 것만 같은 처음 본 작가의 책을.

<경찰관속으로>, 원도라는 현직 경찰관 작가의 책인데

한참 책을 둘러보다 이 책을 갖고 계산대로 가니

내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직원은 일어나 계산을 해주면서 내게 말을 붙였다.

"마침 어제 저도 이 책 읽었는데, 눈물 펑펑 쏟았어요."


본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절반,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또 반의 반,

섬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은 반의 반을 다 읽었다.

얼마 만에 책 한 권을 완독해보는지.

얇고 작은 에세이가 보통 책에 비해 가뿐히 읽어지니 이런 점은 좋다.

특히나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의 말투여서 더 마음이 가까이 있는 듯 읽을 수 있었다.

문장의 호흡이 긴 타입인데도 문장 중간에 쉼표를 자주 쓴다든가,

표현을 정확하게 하면서도 비유적 표현도 즐겨 쓰는 특징이 있는데

내가 선호하는 부류여서 그런가 더 잘 읽혔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왔다 갔다 하는 승무원과 눈이 마주칠까 봐 책에 얼굴을 파묻느라 혼났다.

책을 계산할 때만 해도 책방 직원이 감성적인 사람이구나, 하고 넘겼는데 내가 이러고 있을 줄이야.

먹먹함에 목이 꽉 막히고 머리가 복잡해진 상태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슷한 사연을 겪지 않았음에도 작가의 경험담을 듣고 있노라면

그 경험에서 겪었을 작가의 감정이, 내 전혀 다른 경험에서 느낀 내 감정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 내용과 연관 없는 별개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자꾸 눈물이 났다.


솔직히 요즘 내면의 솔직한 감정을 잘 깨우지 않고 생활한다.

한순간 건물 무너지듯이 폭삭 주저앉아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일에 몰두해보려고 부지런히 일하고 일을 더 만들어서 하고 있다.

그런 내 초반 전력질주를 보며 직장에서 한 선배는 그랬다. 너무 너 자신을 소진하지 말라고.

근데 차마 내 사정을 말하지는 못하고,

"지금은 일만 하고 싶어서 그래요. 일이 좋아요." 하고 말았다.


이 책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장이 있다.

파출소에 근무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는데

하루는 30년 간 시숙에게 폭행을 당한 시각장애인 여성이 와서 신고를 하더란다.

한글을 모르는 신고자를 위해 작성한 서류를 하나하나 읽어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녀가 복잡한 절차를 거쳐 재판까지 갈 가능성은 희박할 거란 걸 알면서도.


작가는 말한다.

한 망가진 인생을 한 경찰관의 노력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위해 노력할 것이고, 

본인의 외침이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 흩날리겠지만

어딘가 뿌리내려 널리 퍼질 거라고.



언제부턴가 외롭지가 않았다.

연애하면서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내뱉는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웠어, 알아?" 같은,

상투적인 말들은 사실 투정이지 진심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짜 외로우면 입 밖으로 외롭다는 말이 안 나온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할 상대가 없기도 하거니와

혼잣말로 내뱉으려 해도 혼잣말은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을 때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침묵의 시간과 사투할 뿐이다.


첫 촬영, 편집, 그리고 방영이 끝난 후 다음 아이템을 찾으면서 일과가 느슨해졌다.

다양한 업무를 하며, 또 시간 날 때는 바쁜 동료를 돕기도 하며 한 주를 보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잠시 망각했던 그 일상의 여백이 다시 찾아와 너무 두려웠다.


소리에 쉽게 피로해지는 편이라 집에 있을 때 굳이 TV를 켜거나 영상을 틀어놓지 않는 편인데

재미있는 프로가 없어도 TV를 한참 켜놓곤 한다.

어스름한 저녁 퇴근해 깜깜한 밤에 적막을 홀로 보낸다는 것이 숨 막히고 두려워서 말이다.

씩씩하게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틈이 생기자마자

내가 이렇게 금방 무너질 것 같아졌다는 게 신기했다.


여러 속성의 내 모습이 겹겹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중 몇 겹은 늘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힘겹고 울적하다.

그 문제의 레이어를 맨 아래로 깔아 숨겨놓고,

가면을 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가 회사에 가 하루종일 사람들을 대한다.

언제쯤 내 감정에 진솔한 채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번 한 주는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저런 감정이 들 여유도 생겨버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울적한 마음으로 본능적으로 회복하고 싶어 무계획으로 본가를 찾았고,

짧은 주말 동안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보통의 일상에 안도하고,

이동 중에 참으로 요술 같은 책을 알차게 읽었지만,

늘 어깨가 뭉친 상태로 살다가 무슨 용한 안마사를 만나 속근육까지 풀어준 것처럼

깊은 내 감정이 건드려진 것 같아 힘들기도 했다.


계획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본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녀오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지쳐있었고 무거웠는데, 그래도 내 집, 내 엄마의 음식,

내 부모님, 내 방, 내 일상으로의 복귀는 언제고 만병통치약이 된다.


다시 자취방에 돌아와 홀로 어둠 속에 들어앉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 놀 때 일하는, 억척스러운 가면을 쓰고 내일 아침 또 씩씩하게 나가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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