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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May 12. 2023

홀로 섬살이 [8-9주 차]

쉼 없는 5월을 보내며


비 머금은 구름이 후두둑,

빗물주머니를 손에서 놓친 것 같았다.

서귀포 어느 바닷가를 가면 비가 몇 방울씩 떨어지다가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은 또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일 듯했다가

숲길로 가면 안개가 자욱해 비상등을 켜고 달릴 정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부지런히 밖으로 다녔다.

이달 첫 주에 촬영을 다녀왔고, 그 다음주 추가촬영이 남아있는 상태로 며칠 동안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래서 5월 첫 주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가야 할 주말이었지만

반가운 손님이 방문해 모처럼 바람도 쐬고

이전에 여행올 때마다 갔던 곳들도 다시 가보면서 휴일을 보냈다.



가장 기억에 남고 비중도 있었던 건 단연 '부영농장의 봄'이라는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장도 구경하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을 한 달여 전에 신청해뒀더랬다.

알게 된 경로는 프릳츠라는 커피 브랜드를 통해서고, 프릳츠가 다음 달 제주에도 매장을 차릴 예정이어서

홍보차 아마 팝업 스토어를 4월, 5월 중에 여는 듯했다.


5월 프릳츠 팝업 스토어


4월에는 제주 시내 어느 빵집 공간을 빌려 기존 카페와 같은 형식으로 운영했고

5월에는 감귤 농장 내 오두막집을 빌려 투어 프로그램을 곁들여 음료와 디저트를 선보였다.


4월 프릳츠 팝업 스토어


4월에 방문한 그 자그마한 빵집에서 익숙한 프릳츠 손글씨가 보였고

한창 외근 다니며 들러 커피도 마시고 작업했던 양재점이 생각나 친숙함이 들었다.

서울서 제주점에 지원해 내려온 직원들은 본인들도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기에, 바에 앉은 나는 그중 한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섬살이 이방인의 처지를 공유했다.

내게 제주에선 어떻게 친구를 사귀는지 또래를 만날 만한 커뮤니티에 대해 물었지만,

나는 여태껏 네트워크를 고민할 시간 여유가 없었기에 앞으로 나도 차차 넓혀가야겠단 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5월 팝업 스토어도 가니 그때 보자고, 아는 체하겠다고 했다.

마치 갓 성인이 돼 처음으로 나 홀로 여행을 가서 만난 게스트하우스 동지들끼리 꼭 돌아가더라도 연락하고 지내자고 했던 그 순수했던 마음처럼, 왠지 모르게 감성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익숙한 프릳츠 커피를 마셔서 좋았고 감귤 에이드는 환상적으로 진했고

감귤 커스터드를 넣은 도넛은 '도나스'라는 이름으로 아주 달달하고 상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나는 커피 이야기를 들으며 농장을 거니는 줄 알았는데,

현 농장주가 운영하는 사업체와 관련해 약초나 건강식에 대해 설명했고,

농장을 걷는 중에는 원 농장주의 농장 설립 이야기와 나무 종류가 주를 이뤘고, 

투어 직전 커피와 도나스를 받았을 뿐이다.


원 농장주는 90대 노년의 여인으로, 지금은 농장을 업체에 넘겼단다.

그 업체는 VIP 프라이빗 헬스케어를 하는 곳으로, 이름 그대로 그다지 정체를 밝히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앞으로는 이 농장 일부에 차 마시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지어 운영할 예정이란다.

그래서 개인적인 공간이었던 이 땅이 공사현장이 되기 전에

놀라지 말라고 예행연습처럼 미리 외부인이 왕래할 수 있도록 이런 투어도 진행하는 거란다.


농약을 치지 않아 여러 종류의 새가 모여드는 부영농장, 꿩이 만들고 간 둥지에 알이 숨어있다.


여하튼 그래서 농장 측에서 이 산책길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 나무는 어떤 나무고,

부지는 몇 평에, 어떤 계기로 처음 만들게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정체가 뭔가 싶은 투어로 기억됐다.


유익한 건강 상식도 듣고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도 먹어서 좋았지만

사전 설명이 있었어야 하지 않나 싶었던 요상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희한하면 희한한 나름대로 의미를 찾는 편이라 충분히 즐겼고,

직업이 직업인지라 혹시 원 농장주는 방송에 노출되는 게 괜찮은지 물어봤으나

역시나 베일에 싸여있고 싶은 VIP인 듯싶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정작 다시 보러 가마 약속했던 그 프릳츠 직원은 그날 없어서 볼 수 없었다.


농장 근처 인디언 음식점, 정원이 잘 가꿔져 있다.

흐린 날씨였지만 바닷물이 고여있는 큰 웅덩이에 발도 담가 보고

서핑하는 사람들도 실컷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찾아다니며 즐겼다.

그런 주말이 지나고도 내 일은 끝나지 않아서, 새벽과 밤에 출퇴근을 반복했다.

어떻게 시간을 써야 체력 안배를 잘할 수 있을까 궁리를 제일 많이 하는 것 같다.


책 반납 기한이 연체된 것처럼 내 개인생활을 누릴 기회도 계속 연체돼가고 있는 것 같다.

싫지는 않다.


로즈마리향이 너무나 좋았던 식당, 어디서 이렇게 진한 향이 나나 했더니 초를 켜 허브를 데우는 지혜!


그리고 렌터카를 타고 여행 다니며 실컷 음악을 들은 탓에 덮어놨던 말랑한 감성이 깨어난 것 같았다.

자중할 필요가 있다. 냉철한 섬살이 청년 직장인으로 남겠다.


궂은 날씨도 무릅쓰고 날아와준 손님에게 고맙다.

든 자리는 몰랐는데 난 자리는 표가 확 난다.

이번 주말은 집에 갔다가 할머니댁도 갈 예정, 가정의 달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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