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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May 21. 2023

홀로 섬살이 [10주 차]

예쁜 마음들

줄곧 내가 떠올리는 것들이 무엇인지 관심 가질 여유가 생겼다.

세상엔 예쁜 마음들이 있다.


섬에 온 뒤로는 일상을 텅 비운 채 지낸다.

실로 새로운 경험이긴 하다.

저마다의 인생사를 메모리나 쿠키에 빗댈 수 있다면

마치 영 테라바이트 상태인 새 외장하드나 포맷한 컴퓨터를 받은 것처럼 무(無) 상태로 사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정말 일만 하러 왔다 보니 현재 일상의 전부는 직장이 됐다.

자연스럽게 집에 와서도 회사 생각이 나고, 그게 아니면 섬으로 들어오기 전 내 삶이 떠오른다.

유쾌하지는 않다.

월급쟁이가 평생 꿈도 아닌 내가 자는 시간 빼고 온종일 회사 생각을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하루의 끝에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는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이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떠올라도 애써 도리질을 치며 뇌리에서 떨쳐버린다.

이불킥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별로라고 느껴지는 때가 많아서 떠올리면 괴롭다.


어느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그란 눈에 마음 약해져 삶은 한치를 한 점 주니 젓가락에 있던 걸 낚아채 물고 나갔다가 돌아와 다시 같은 눈으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도리질 치는 와중에도 계속 머리를 맴돌던 것들이 있다.

회사 사람들의 마음이 참 예쁠 때가 있다.

하루 종일 회사에 틀어박혀 일만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가족한테 쏠려있는 엄마의, 아빠의, 또 자식의 마음이 예뻤고

상처 주거나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귀엽네!' 한 마디로 용서하고 자신의 마음도 정화한다는 동료의 마음이 예뻤다.

내게 바탕화면으로 쓰라며 직접 찍은 사진을 보정해 주는 어느 선배의 마음도 그랬다.

철저히 가면을 쓰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약간은 AI 같은 사람으로 지내야지 했는데

또 이렇게 사람에게 진심이 되는 순간이 온다.


회사에서 보는 기혼자들은 대체로 몸이 두 개쯤 되는 것처럼 사는 듯 보인다.

짬짬이 반차를 쓰고 아이를 데리러 간다든가, 병원을 데리고 간다든가 하고

미처 못한 일은 또 틈틈이 다른 사람의 두 배의 속도로 쳐낸다.

늘 신경이 가족에게 가있으면서 어떻게 일은 또 그렇게들 하는지.

가정에 충실한 사람들을 보면 '은근히 주변에 저런 사람들 정말 없다' 싶으면서도 여기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 같다.


풍미 가득한 핸드드립 한 잔은 짧은 시간 안에 힐링을 선사한다. 핸드드립 마실 때 나는 얼음도 따로 달라고 한다.

지난 제주 북 페어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웠던 동료 구성작가.

씩씩하게 부스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그간 펴낸 책을 소개하는 그녀를 응원하고자

급하게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를 건네고 신간을 한 권 샀더랬다.

일부러 시간을 내 읽지 않으면 찬찬히 다 읽지 못할 것 같아 어제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단숨에 읽어내려가면서도 몇 번이고 코끝이 찡해 멀리 창밖을 봤다.

그녀의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조바심,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버텨온 꼿꼿함, 가족을 향한 걱정이 묻어나

마음이 아리기도, 꼭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 알진 못하지만 일단은 책 한 권에 들어있는 그 대단하기도 안쓰럽기도 따뜻하기도 한 마음이 예뻤다.

짧은 독후감을 그녀에게 전하고, 같은 동네이니 곧 우리 만나야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회사 선배가 바탕화면 하라고 보정까지 해서 보내준 바다 사진. 사진에서 온도가 느껴진다.


지나온 한 직장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게 불현듯 기억났다.

가까이 지내던 한 동료에게서 뚜렷이 보이던 어떤 결핍이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도 아는지 사람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고

또 그만큼 경쟁 심리도 많이 느끼는 듯 날이 서 있을 때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이 오던 날 SNS에다 글을 쓴 적이 있다.

모양이 다른 저마다의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고.



본가에 가지 않는 주말, 특별히 계획이 있지 않은 이런 텅 빈 날을 맞을 때는

꼭 주말이 오기 직전 금요일 밤, 예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후배에게서 전화가 온다.

뭐 하고 있는지, 밥은 챙겨 먹는지, 정처 없이 걷고 있지는 않은지.

벌써 들통난 듯하다.

그런 질문을 받을 만큼 내가 처량해 보였다면 철저하다고 믿었던 내 사회적 가면은

구멍 숭숭 이미 생명력을 다한 것 아닌가 싶다.


나 외에 가족이든 친구든 주변을 살피는 마음, 그것이 따스한 인류애든 자신의 만족스러운 삶에서 나오는 여유든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내 일상에 여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그 동료의 마음에서 보였던 결핍을 골똘히 생각해봤던 때처럼.


이번 주 내 공간에 며칠 머물렀던 육지서 출장 온 선배를 공항에 바래다주며

별 감정이 안 들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쳤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무섭다는 걸 또 느끼면서,

나를 마음 쓰이듯 바라보던 선배의 눈빛과 내 손을 꼭 맞잡던 그 힘이 잔상처럼 남는다. 


두 시간여를 걸어 당도한 바닷가 카페. 망망대해는 서글프면서도 가슴이 뻥 뚫린다.

결국엔 보고 싶은 한 사람을 그리는 이 정처 없는 마음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예쁘네, 따스하네, 본받을 만하네,

혼자 감상평을 남기면서 떠돌고 있다.


이렇게 마음이 매일같이 아린 걸 보니 초여름이 오고 있나 보다.


오늘의 곡,

<나는 다 너야> - 이승환

https://www.youtube.com/watch?v=58cUaViQ_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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