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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May 29. 2023

홀로 섬살이 [11주 차]

박수칠 때 떠날 사람, 박수받으며 떠나고 싶은 사람

박수칠 때 떠나라.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열광한 적 있었던 것 같다.

영화 때문인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서 검색해보니 2005년 개봉한 차승원, 신하균 주연의 코미디 영화 제목이다.


내가 꼭 이런 사람이다.

뭔가 좀 해볼 만하면 내 자리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트던 비효율적인 중고 신입.

다행인 것은 지나온 몇몇 직장에서 내가 퇴사할 때마다 아쉬워해줬다.

같이 더 일하면 재미있을 텐데, 이제 슬슬 팀워크가 맞아가는데, 같이 더 오래 못 있어서 아쉽다, 등등.

최소한 내가 나가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반응은 없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나는 딱 그 정도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다.

더 오래 다니면 이런 좋은 인상도 옅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이다.

오랜 인간관계를 자신 없어하는 내 성향 탓에 자꾸만 새로운 곳을 찾는 것 같고.

인간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공든 탑처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단점이 보이게 마련인 것.


나는 1~2년 만에 헤어짐을 반복하고 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사회적 주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든 흠은 절대 보이기 싫고 좋은 인상으로 보이고 싶은 강박 때문에

내 사회성과 인간성은 딱 여기까지인 게 아닐까, 1~2년 소비기한을 가진.

씁쓸하기도 하고 지치지기도 해서,

인간관계에서 정답을 못 찾아 힘든 적은 없는데도 그저 힘이 부친다.


내년이면 계약이 끝나 나가야 하는 내게 마음을 쓰는 직장 상사들을 보며,

절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속으로 반복해본다.

나는 또 새로운 기회가 있다면 이전에 그랬듯이 갈 것이고,

이 계약 건은 입사 전부터 내가 보고 고른 기회이니 누가 미안해하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므로.


타이밍이 맞아 현 직장에서 내가 나갈 시기에 새 인력을 채용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또 지원하기는 하겠으나

지금으로선 나갈 것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두어 달 지났다고 일도 점점 손에 익는다.

이제는 처음만큼 계속 힘이 들어간 채로 일하지만은 않는다.


모든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 싶듯, 모든 회차에 다 좋은 작품을 올리고 싶은데

현실 핑계를 대자면 한 회 한 회가 늘 일정한 노력과 시간의 결과물일 수가 없다.

공 들여 섭외한 인물에, 내가 한 장면 한 장면 구상한 구성안으로 계획한 대로 찍어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촬영해야 하는 날에 맞춰 허겁지겁 여러 사람들에게 섭외 요청을 하고

후다닥 만들어낸 구성안으로 딱 기본만 찍어올 때도 있다.

소위 일을 일로 대했을 때 나오는 결과물 말이다.


그래도 평균 이상은 하자,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기준 정도는 갖고 일한다.

그게 출연자와 제작진이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이니만큼 예의상 당연하기도 하고.


각종 행사와 다른 특집 편성이 생겨나면서 다음 작품을 올리기까지 여유 시간이 2주나 생겼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1년쯤 다니면 여유도 찾고 그러려나. 그때쯤이면 이미 이삿짐을 싸놨겠지.

금요일 밤, 처음으로 부서 전체 회식을 하고서 한 주를 마무리했다.



지난해부터는 나를 내가 아닌 듯이 눌러놓고 살아 그런지

회식만 하고 나면 꾹꾹 눌러놨던 감정이 혹시나 술기운에 튀어나왔을까 봐 전전긍긍하곤 한다.

괜히 나 혼자, 회식 후 첫 출근날은 공기가 어색하다.

아주 아주 아주 편한 사람과 있지 않은 이상, 주사는 상상할 수도 없이 말짱하게 정신이 깨어있는 나였는데,

이젠 깨진 유리성처럼 한순간 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까 봐 불안한 것도 있다.


또 평소 회식 때는 업무의 연장이라 생각이 드니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가 술 마실 사람이 또 어디 있겠나 싶어 술자리만 생기면 페이스 조절 없이 마셔버리는 탓도 있다.


한 번 망가졌던 위장은 들이켜는 대로 넘기지 못하고, 속이 메슥거리는 때가 2차 자리쯤 되면 온다.

아직 더 달려도 될 법한데, 몸이 힘들어하는 걸 느끼며 격세지감 네 글자를 떠올리곤 한다.



꼬박 서너 시간 눈 붙였을까, 깨보니 토요일 오전 일곱 시 반이었다.

알람도 건너뛰고 새벽에 잠시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큰일 났다 싶어 서둘러 필요한 짐만 챙기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여덟 시 이십 분 비행기였고, 늦지 않게 탑승 수속을 밟았다.


급히 항공편을 잡다 보니 본가로 바로 가는 비행기는 벌써 매진이고

다른 지역을 경유해 집으로 가면서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흐리고 비 오기를 반복한 주말 연휴여서였을까, 자꾸 눈물만 났다.

부처님 오신 날이었는데, 왜 마음이 도통 편하지 않았을까.


집은 언제나 안식처다.

삼 년 전, 서울서 내려와 집에서 출퇴근하게 됐을 때,

자취생활을 접고 집으로 들어오며 2년 간 참 많이도 부모님과 다퉜더랬다.

깊은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었지만 함께 부대끼며 살면 다툼도 많다는 걸 그때 느꼈다.

반대로, 나가서 살면 그 다툼의 자리에 애틋함이 자리잡는다.

전화 너머 목소리로 점점 노쇠해가는 부모님의 건강을 체크하게 되고

컴퓨터 쓸 일이라든지 뭔가 알아볼 일이라든지

멀리서라도 그런 작은 것들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날씨가 저기압이면 나도 그 전날부터 기운이 빠진다.

회식 후 회복도 안 됐겠다, 날씨도 온통 회색이겠다,

집에 와서는 시간이 아까워 최대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데

이번에는 그저 쉬기만 했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주는 엄마 밥을 그렇게 잘 넘기지도 못했다.


그래도 엄마와 백화점에 가 차도 한 잔 마시고

시장에서 열리는 트로트 콘서트도 보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 그땐 비가 그쳤고 사람들도 많이 모였다.


집에 있는 데스크톱이 16년이 됐다.

작동은 되는데 너무 느려서 아빠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컴퓨터 좀 바꿔달라고 노래를 부르셨는데,

내가 알아보기 귀찮고 잘 모른다는 이유로 미루고 미뤘더랬다.


매장에 가서 알아보자며 둘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삼성전자스토어와 LG베스트숍을 둘러봤다.

원래는 다른 건 다 있으니 본체만 인터넷 주문할 심산이었는데,

온라인 공식 몰에서는 본체만 팔고 있지는 않았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검색창에 데스크톱 본체를 검색하면 중고 상품만 나왔다.


일단 매장으로 갔는데 역시나 요즘은 수요가 없어서인지 종류도 두 종류,

사양도 그다지 높지 않은데도 노트북 한 대 가격을 호가해 입이 떡 벌어졌다.


둘러보다 LG에서는 이 가격이면 노트북을 추천한다고 했고,

나 역시 동의했던 터라 이왕 노트북을 할 거면 사양을 더 높여달라고 했다.


마침 진열상품으로 나온 물량 중 뜯지 않은 새 제품을 진열상품 가격으로 주겠다고 했다.

컴퓨터에 대해 잘은 몰라도 대략 이 사양에, 이 무게에, 이 크기인데 이 가격이면

손해는 아니겠다 싶어 아빠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노트북을 사기로 결정했다.


바둑 프로그램과 문서작업할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아빠가 이용하기 쉽게 배열을 해드렸다.

별 거 아닌데 뿌듯했다.

나는 별의별 작업을 다 하더라도 8년 된 노트북을 써도 되는데,

문서작업과 바둑게임만 하는 아빠는 잘 돌아가는 새 컴퓨터를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이제야 사드린다. 물론 돈도 내가 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집에만 가면 또 다잡았던 마음이 풀어져 약해지기 일쑤다.

섬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고 티를 냈더니 엄마나 아빠나 마음이 안 좋으셨나 보다.

아직 착륙도 안 했는데도 통 전화도 없는 아빠한테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마음이 안 좋았다는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어 집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괜찮다고 말해주고

내 공간에 들어와 짐을 풀고, 빨래 돌려놓고, 씻고, 방청소하고, 밀린 설거지하고,

볶아서 가스를 빼놨던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을 해봤다.


연일 울적한 마음이 드는 건 하늘에서 누가 내려보내는 신호 같기도 하고 그렇다.

자는 동안 꿈이라도 꾸면 좋으련만.

내일부터는 또 일에 몰두해보자.


커피 이야기는 이번 주에 쓰고 싶었는데 다음 주로 미루겠다.


오늘의 곡은

<니편이야(On Your Side)> - 영탁(YoungTak)

https://www.youtube.com/watch?v=fc-lKLdZf1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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