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y J May 30. 2023

빈 공간과 싸우는 이 밤

어제 또 그저께처럼 괴로운 오늘 밤에는

정신없는 하루를 마치고 내 공간에 들어오면

현관문을 기점으로 경계가 나뉘어 여유로운 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지만,

난 바깥세상의 정신없음이 쭉 이어져서 동시에 두세 가지씩 집안일을 해.

옷가지를 벽에 걸어놓고 세탁기에 넣을 빨래는 따로 두고

아침에 안 한 설거지를 하거나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가글을 하면서 화장실 청소나 방바닥 청소를 하기도 해.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간단한 요리를 하기도,

다음날 회사에 들고 갈 티백이나 원두를 챙겨놓기도.

로션을 온몸에 바른 뒤에는

휴대폰과 안경, 스마트워치를 닦고 충전기를 꺼내와.

참, 나 지금 다니는 회사 합격하고 큰맘 먹고 스마트워치 샀어.

샤오미 시계는 화면이 고장났는데 서비스센터 전화하니

1년 내 새 제품 교환을 해줄 뿐 AS는 안 해준대.

휴대폰도 새로 샀는데 원래 쓰던 것도 지니고 다녀.


뒤도 안 돌아보고 정시 퇴근을 하는 날도

집안일을 하고 나면 여덟 시가 훌쩍 넘어.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고도 이 작은 원룸이 텅텅 비게 느껴져서

유튜브로 아침에 듣다 만 라디오를 켜서 들어.

영어로 된 소설도 매일 조금씩 읽으려는데

처음 의지와 달리 눈에 잘 안 들어와.

퇴근하고 나면 머리 쓰기가 싫은가 봐.


그러고도 고요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원래는 이 시간에 뭘 했더라 떠올리면서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또 깨달아.



우리가 통화하던 많은 순간이 이젠 아련하게 남아있어.

언제쯤이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 봐.

뭘 어떻게 해야 그날 내가 냈던 짜증을 주워 담고

일 땜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욱해서 미안하다고

멋쩍게 손 내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어넘기고

같이 노래 부르며 걸을 수 있을까 싶어.


내 장난스러운 화음이 틀렸다고 역정 내면서

노래를 멈추고 다시 제대로 불러보라고 해줘.

옛날 노래 좋아하는 나도 잘 모르는 90년대 노래를 가르쳐 줘.


괜찮지 않지,

괜찮을 수가 없지.

난 괜찮아질 수가 없다고.

괜찮아지지 않을 예정이야.

어디엔가 숨어서 내 앞날을 위해 기도해준다 한들

나는 살아있는 한 이대로 지낼 참이야.

괜찮아지려고 하는 게 모순이잖아.


그래도 지금 회사 다니면서 많이 밝게 행동하고

웃기도 자주 소리 내서 웃고

역겹다고 생각했던 음악 감상도 종종 하려 해.


난 왜 그렇게 복잡한 점심시간에

직장인 틈을 비집고 닭갈비를 먹으러 갔을까,

왜 곧 그만둘 거면서 바쁨을 자처했을까,

남은 휴가도 있었는데 왜 굳이 일을 하러 나갔을까,

간절했던 전화를 그따위로 받고 짜증만 잔뜩 냈을까.

왜 그 애처로운 손을 잡아주지 못했을까.

붙잡아주기는커녕 등 떠밀어 보냈을까.

마스크를 내리고 웃는 입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그거 알아?

지겹던 팬데믹이 끝났고 이제 마스크 안 써도 된다.

이제 마스크 없이 웃고 이야기하면서 지하철 타자.


언제쯤이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 봐.

통화하고 싶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 걱정, 고민 다 털어내면서.



작가의 이전글 홀로 섬살이 [11주 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