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섬살이 [15주 차]
올해 장마는 덜 우울할까요?
몸이 고된 이른바 3D 환경에서 하는 촬영을 주로 잡다 보니
원래도 제작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엔 바다로 나가면서 누적된 미안함이 최고치에 달했다.
그 미안함이 희석될까 해서 나도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굳이 내가 카메라 앞에 설 필요는 없었지만 애초에 적은 인원이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왁자지껄해보이겠다는 명목으로.
덥고 습한 날씨에 촬영 시간이 길어지고, 기다림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촬영 호흡도 끊기는데
간간이 분위기를 살펴보니 불평불만인 기색인 사람이 없어 한시름 놨다 했다.
끝나고 나선 딱 기대한 만큼 보람 있었다.
촬영 끝나고 회사에 들어오면 딱 그런 기분이 든다.
아마 넘치는 보람은 아닌 이유가 촬영은 1%에 불과하고 앞으로 해야 할 편집이 99%여서일 것이다.
피곤이 쌓이고 쌓인 한 주였다.
그동안 조근, 야근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타고난 체력을 과시하던 난데,
그게 한순간 무너지는 듯했다.
피곤해서 눈을 떠있기도 힘에 부쳤고 당연히 편집이 잘 될 리가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선배는 집에 좀 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 드러누워있는 걸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는 터라, 생각 좀 해보겠다 대답했다.
결단을 내려 하루는 휴가를 써보기로, 하지만 그날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건강검진이나 하자 싶었다.
업무적으로는 빠듯한 주가 아니었다.
지난 주말 행사를 방영하면서 내 프로그램이 결방됐고
한 주 시간을 번 나는 내 일을 미리 당겨 해뒀다.
금요일 밤엔 본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지친 한 주를 보내서 그런가 집에 가는 길은 몸이 가뿐했다.
어서 집에 가서 지친 기색 다 털어버리고 새로운 주말을 맞이하고 싶었다.
외할머니 생신이 곧 다가와서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
이모네 식구들과 한 차로 외할머니댁으로 향했다.
외가의 엄마를 포함한 5남매가 다 모였고, 사촌 조카들까지 모이니 떠들썩했다.
온 집안 통틀어 나이로는 가장 막내인 내가
사촌들과 사촌 조카들의 중간 지점에서 어정쩡한 위치였지만,
어릴 때부터 또래가 아닌 나이 많은 어른들을 쫄쫄 따라다닌 덕에 나는 어른들과 잘 섞였다.
오래간만에 우리 가족 세 식구도 한 방에 나란히 잤다.
마당에 숯불을 피워 장어, 돼지고기, 새우, 구울 수 있는 건 맛있게 다 구워 먹은 듯싶다.
모처럼 다 같이 모이니 외할머니도 내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흔아홉이 된 할머니를 위해, 실은 사촌 조카들이 먹고 싶어해서 생일 케이크도 준비했다.
농담으로 "초를 99개 꽂을까?" 했지만 참 정정하신 할머니가 대단했다.
나는 저렇게 꼿꼿이 늙을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곱게 늙을 수 있을까.
요샌 그렇다.
지난해부터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면서,
딱히 오래 살 자신도, 의지도 없어졌다.
그저 살 동안 세상에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주고
운이 좋으면 사회에 내 이름 한 획을 긋고
부모님이 건강히 늙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사는 것,
그 외에 장기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외할머니댁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갔다.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길이 머릿속을 비우는 데 충분히 역할을 했다.
섬으로 들어오는 길, 이미 빗줄기는 시작됐고
도착해 공항을 빠져나오니 본격적으로 습한 기운이 얼굴을 감싸왔다.
다시 왔구나.
지연된 항공편이 나를 조금 더 지치게 만들긴 했지만
이제는 또 눈앞이 막막하다거나 부담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섬에 들어와서야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장마는 좀 덜 우울하게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장화와 튼튼한 우산은 필수.
우비는 비싸서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