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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19. 2021

냉혹한 현실, 달콤한 환상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어."


손가락이 가늘고 긴 윤서는 불안한지 그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말하곤 했다.


"뭐 다 그런 거지." 


그 애와 난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한동안 연락이 뜸했었는데, 최근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지만 윤서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지나간 5년 동안 그 애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 애는 학위를 따고 좋은 직장을 구해 돈을 벌었고, 일을 잘하는 편이었기에 인정도 받았다. 가끔 하는 일이 내게 맞는 일은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디자인 공부를 못 해본 것이 한이 되기도 하고, 일에 치이다 보면 자신이 사회의 부속품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는 그녀는 멋있고 섹시하지만 왠지 슬픔과 적적함이 묻어나는 소리로 말했다.


"다, 그런 거지 뭐."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냉소적인 얼굴로 뭉게뭉게 피어났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하는 얘기를, 처음에는 그저 무감각하게 듣고 있었다. 얻은 게 있다면 잃은 것도 있다는 그 소리를 다소 쓸쓸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 애가 왜 그런 소리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넘어가는 그 애와 나, 우리가 아무리 10년 전 즈음엔 여고생의 천진난만한 치기 어림으로 같은 교실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하더라도, 그 순간 그 애와 나 사이에 공통분모는 그저 딱 하나뿐이었다. 동시대를 살아내는 젊은 여자라는 것 말이다.


그 애는 치열한 사회의 직업전선과 냉혹한 결혼 시장에서 '다 그런 거지 뭐'의 냉소 성으로 무장한 채 자신이 이십 대에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 애가 잃어버린 것은(혹은 잃었다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탱탱한 피부, 순수성, 꿈과 희망, 어떤 고민 없이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 시원하게 자기 얘기를 할 곳, 기대어 펑펑 울 누군가의 어깨, 삶의 여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선택의 범위 등등.


반면, 그 애가 이를 잃어가면 얻어낸 건 그녀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가가 상승하듯 그녀의 외적 가치만을 가시적으로 상승시키는 것들뿐이었다. 그 가운데서 그 애가 가장 크게 잃은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가치였다. 사랑, 그냥 사랑도 아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사랑 그대로의 사랑 말이다.






그 애가 사랑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나는 보았다. 그 애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그 애는 적어도 사랑에 대해서만은 '다 그런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냉소적이던 그 애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단숨에 순수하게 사랑했던 5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5년 전 사랑했던 B를 이야기하며 그 애는 냉소가 아닌 절실함 속에 자신을 풍덩 빠뜨렸다. 갑자기 윤서의 눈빛은 마치 처음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여고시절 친구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나간 사랑, 다시 찾고 싶은 사랑은 그 애가 품고 있는 '환상'의 마지막 보루, 그 끝자락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애는 '현실의 냉혹함' 반대편에 '환상의 달콤함'을 얹어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현실과 환상을 재는 저울의 양팔이 동등하도록 현실을 냉혹하게 자각하는 그만큼 환상의 달콤함에 목숨을 걸고 있는 거였다.


그녀가 가진 환상의 정체란 바로 지나간 사랑,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추억, 예전에는 내 세계에만 속해있던 그 사람, 나에게 큰 행복을 주었고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만 보곧 몇 날 봐 칠 아무것도 않고 그저 정지해버리고 싶었던 순간들.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만큼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환상의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처럼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진짜 미친년처럼 그 사람을 찾기 시작했지. 참 인터넷은 쉽더라. 갖가지 검색엔진에 그 사람을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그 사람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조합했지. 그래서 결국 찾았고."


그렇게 찾은 그 사람은 그 애가 5년 전 그토록 사랑했으며, 사랑을 줬다고 믿었던 바로 그 사람이 맞았다. 5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그대로 유지시키기도 하니까. 다만 그 사람이 5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에게는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과, 윤서가 그 사람을 애틋하게 여기는 그만큼 윤서를 애틋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


그는 그저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가 너무 열렬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고 예전에 그녀가 그를 버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묘한 자존심이 건드려지기도 했고,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연락을 받고, 그녀와 커피 한 잔을 함께 했을 뿐이었다.


그는 지탄을 받을 만한 어떠한 유혹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환상을 팽창시킬 만한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는 그 사실 하나, 그녀의 안부를 묻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졌다는 그 모습 하나가 논쟁거리가 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듯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데에 두른 말투, 비언어적인 암시로 그녀에게 전했다. 그는 다시 그녀를 만날 용의나 의도가 전혀 없다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가슴속에 팔딱이는 어떤 상처 나 오기나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라,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사랑을 명백히 그녀에게서 지금의 여자 친구에게 흘러갔기 때문이고, 확실히 그들의 사랑을 변하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들이 5년 전 철 모르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반지를 교환한 적이 있다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엔 점점 커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매일 밤 그에 대한 꿈을 꾸며 울다 웃다가 씁쓸해 하기를 반복했다. 나를 만날 그즈음 윤서의 환상은 너무 부풀려져 있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랑의 환상은 여러 가지 순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환상을 안고 있다면 현실에서는 그저 뒤뚱거리게 될 수밖에 없다. 밤잠을 못 이루고 몇 달 동안 고민하며 그에게 집착하는 동안 윤서는 현실에서 버틸 에너지를 많이 소진했다. 현실이 냉혹하기에 환상의 달콤함으로 도피하려 했던 윤서가 현실을 더 냉혹하게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애가 더 건강해지려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며 자신의 환상을 키워가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환상 속에서 나와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환상에서 나오기만 하면 B 만큼이나 혹은 B보다 그녀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는 현실의 남자와의 사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 남자를 찾기 힘들다고 해도, 환상의 사랑보다는 현실의 사랑이 나았고,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과의 사랑보다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과의 사랑이 더 나은 거였다.



우리가 지나간 사랑 혹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에게 매달리는 환상적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지나간 사랑에 매달렸던 시점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그 시기에 그녀는 사랑보다는 능력과 조건을 맞춰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번번이 실패했고,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사랑에 염증을 느꼈다. 그래서 순수하고 맹목적으로 사랑을 했던 이십 대 초반의 사랑이 그리워졌고, 그게 진정한 사랑이며, B만이 그녀를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줄 마지막 카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대학시절 막연히 품은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환상도 그저 허울뿐이었다는 생각에 무참히 깨어졌고, 그녀는 그저 무방비 상태로 현실에서 상처 받았다.



현실은 냉혹했고, 현실을 냉혹하게 보기 시작한 그 시점에는 누구든지 달콤한 환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나를 결혼시장에 매물로 나온 상품으로 평가하거나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과의 환상적인 사랑 말이다. 직장 생활에 배반당하고 현실적 사랑에 배신당한 그녀는 애타게 5년 전 사랑을 다시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이 환상이라고 해도 이 환상을 현실화하며, 그녀의 현실적 고민이 모두 환상적으로 해결될 거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환상을 현실화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환상을 현실화한다고 해도 그 환상은 이제 또 다른 현실이 된다는 걸. 냉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찾은 환상은 결코 냉혹한 현실을 환상적 현실로 바꿔주지 않는다는 걸. 환상은 어느 정도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있고, 사랑의 환상은 사랑을 현실화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환상에만 들어가 있으나 현실을 잊어버리게 되고 현실을 멀리한다면, 환상 때문에 현실이 더 힘들어질 수 있는 걸 말이다. 예전 남자 친구에게 집착하느라 거절했던 사랑의 기회, 소홀히 한 현실적 과업 수행,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엄청난 감정 소비를 보면 그녀는 확실히 환상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두 달 만에 환상에서 깨어났다. 일 때문에 만난 사람과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그 전후 관계는 분명치 않다.) 그러면서 그녀의 냉소 성은 많이 옅어졌고 그녀는 행복을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냉혹한 현실은 달콤한 환상을 필요로 하고, 일단 환상에 빠지게 된 사람이 다시 현실로 나오려면 그 환상의 달콤함을 대체할 만한 달콤한 현실이 필요한가 보다. 


환상의 사랑에서 나와 현실의 사랑에 진입하게 된 그녀는 이제 예전 남자 친구였던 B가 생각이 안 나고 본인이 왜 그렇게 그에게 집착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는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깜찍하게 웃으며 말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난 걔가 그리웠던 게 아니라, 5년 전의 내가 문득 그리웠나 봐. 두 달 전엔 너무 힘들었으니까."


지나간 사랑이 가진 환상적 요소에는 이것도 포함된다. 내가 그 사람만 만나면 그 시절의 나로 훌쩍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지나간 사랑 속 그는 5년 전으로 나를 되돌려줄 수 있는 타임머신이 아니니까. 그는 그저 진정한 사랑을 알기 위한 시행착오를 나와 함께해 줬던 사람에 불과하니까.


고맙긴 하지만 뭐, 다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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