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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21. 2021

엄마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모성을 둘러싼 두 권의 책을 낸 후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

'모성'은 저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주제입니다.

엄마가 되기 전부터 상담자로써 모성에 관심이 많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부터는 더욱더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출간한 두 작품이 모두 엄마에 대한 책들이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가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고난 후,  독자붙들로부터

엄마를 둘러싼 복잡하고 진한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엄마라는 단어에 걸려있는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끈질기고 깊고 진할까.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은 엄마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제가 과연 엄마 상처를 극복할 수있을지 모르겠어요"


라는 질문이자 고민에 대해, 모성에 대한 책을 두 권 출간한 지금  

이 시점에서에 느끼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1. 극복이 아니라 공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마음에 담긴 것을 '언어화'한다는 것, 그 가치를 매번 깨닿지만 또 그런만큼 언어의 한계를 만나기도 합니다. 항상 언어라는 테두리에 다 담기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언어가 또 얼마나 오염되기 쉬운가도 보게 됩니다.


상처라는 말도, 극복이라는 말도, 치유라는 말도, 온전히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체할 수 있는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했기에 이런 말들도 대신 하는 것일 뿐,


저는 상처를 믿지 않고,

극복을 목표로 두지 않고, 

치유라는 말도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 어딘가 부서지고 걸려넘어지고 채이는 듯한 마음이 있다면, 이 마음을 극복하자고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이 마음을 어떻게 잘 보살피고 이 마음과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보자고 말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극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존'하고 있습니다.




2. 저 자신이 엄마가 되면서 엄마의 자리가

얼마나 고단하고 어렵고 뜨거운 자리인가를 실감했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엄마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장면, 한 존재에 대한

다양한 각도, '다중 소실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까요?)


엄마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니,

세상의 많은 엄마들에 대해 ,그저 이만큼

모성 수행의 바통을  넘겨주신것만도 감사하고,

항상 그 자리에 건재하신다는 것만으로 든든하고,

'이제 겨우 엄마로 10년을살았을 뿐인데 앞으로도

나는 대체 어떻게 이 엄마라는 자리를 어찌 채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작아지지 않고 되려 커지기에.....


'우리 엄마는 왜?'라는 질문이

어딘가로 용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3. 엄마를 둘러싼 마음을 일상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듣고 쓰고, 그리고 또 그 이야기를

엄마와도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누다보니,

언젠가부터 뜨거운 마음이 따스함으로,

컸던 마음이 조각조각 잘라져서 제 삶에 더 잘 활용해볼만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소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하다보면

결국 가장 중요한 알맹이(((♥)))로

모든 마음이 수렴될것을 믿습니다.)


마치 크고 어마어마하고 딱딱했던 어떤 물성을 가진 덩어리가 일상의 풍경이 되고 작품이 되는 생생한 정물이 되었다고 할까요. 계속 이야기하고 나눠가시다보면 지금은 막막하고 뜨거운 어떤 마음이든 결국 더 잘 주무르실 수 있을 거에요.


지금 당장 느끼는 마음이 크고 어마어마하고 깊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쭉 갈리가 없습니다.  

감당이 안된다면 더 감당해볼만하게 될때까지 얘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얘기를 해볼 수 있는 상대는 선별할 필요가 있지만

어떤 얘기든 해보고 싶은 만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세요)



4.  독립과 거리두기를 강조하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거나 함께 살고 있으면서

심리적인 독립을 이야기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엄마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과 애틋함이 그 거리 속에,

마음의 여유공간안에 생깁니다.


하던대로 반응하지 않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쉼표를 넣을 수도 있고요.

가까운 가족일 수록 이런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인 거리두기가 어려울 때는

물리적인 거리두기부터 일단 시도해보세요.


5. 엄마를 나의 엄마가 아닌 그냥 엄마로,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관찰'해 보세요.


엄마에 대한 여러 감정에 얼키고 설킨 마음에 힘들어하시는 분, 그 마음 자리에서 도돌이 표를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에는 상담실에서 이런 제안을 해보곤 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엄마에 의한, 엄마를 통한,

엄마와 관계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한 여성의 하루를 상상해보자고요.


아침에 일어나 어떤 망설임없이 주방에 가서 가스불을 올리고 반찬들을 차려놓고 식구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그리고...... 그렇게 매일같이 딸려가고 펼쳐지는 하루의 일과들.


 그 일과를 밀고 나가는 한 여성의 옆모습, 뒷모습,

중간중간의 한숨들 웃음들,

보이지 않는 마음 그리고 너무 뻔하고 빤히 보이는 마음,

하고자 했던 것과 결국 할 수 밖에 했던 것 사이의 낙차를 안고

결국 기도하며 코를 골며 식구들 걱정을 하며 다시 잠의 세계로 빠지는 모습..

그녀가 낮에 꾸는 꿈 그녀가 밤에 꾸는 악몽들,

그녀가 살고자 했던 삶, 하지만 살수 밖에 없던 삶,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펼쳐졌으면 하는 그녀의 삶.


엄마라는 렌즈를 벗고, 내 엄마라는 명명을 내려놓고

그녀의 하루, 그녀의 한 생애의 축소판일 수 있는 그녀의 하루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녀를 멀리 떨어뜨려 볼수록

결국 그녀를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될 겁니다.


안아주세요.

그녀를 안아주는 일이 결국

나 자신을 안아주는 일이된답니다.



6. 인연이지 운명이 아닙니다. 상관관계일 뿐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엄마는 우리 삶의 초기설정값이었고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지요.

아마 우리 삶의 인연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연일 겁니다.

하지만 엄마가 우리의 운명은 아닙니다.


스무살이 넘었다면,

바라건대 엄마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요.


엄마탓을 계속 하다보면 그럴수록

그 엄마에게 우리가 더 깊이 묶일 수밖에 없는

수렁과 고리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로막는 것이지요.


엄마라는 시작점에서(그리고 가족이라는 시작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그 기회를 나자신에게 선물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럴 힘이 내 안에 있음을, 걸어 나가보시면서,

분명 발견하게 될 겁니다.


걸어나오세요.














<엄마를 위한 동그라미> 책 소개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371996&memberNo=40185955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책 소개

https://blog.naver.com/geuldam4u/221303677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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