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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Jun 13. 2021

내내 기다렸던 것 하지만 오지 않았던 것

그냥 울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더이상' 울지 않는 그 아이의 눈빛.


나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가 없었던

과거의 어느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 복도 끝에 내복만 입은 아이가

아파트 복도 너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벽 사이에 생긴 허공 너머로

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태로워보였다.


그 때 나는 두꺼운 패딩 잠바에

목도리와 장갑, 털모자까지

챙겨 입고 나서던 중이었는데


아이는 매서운 추위에도

맨살과 맨발이 훤히 드러나는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너무도 태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가 그런 차림, 그런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머 너 안 춥니? 왜 거기에 있니?'


가까이 다가가 이유를 물으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가리켰다.


현관문이 닫혀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부부싸움’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그 상황이

아이에게는 얼마나한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전쟁’이었을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울기도 지친 모양이었다.

온 얼굴에 눈물 자국 콧물 자국이 말라있었다.

그냥 울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더이상' 울지 않는 그 아이의 눈빛.


그 눈빛을 바라보다가,

내가 앞으로 오랫동안

이 눈빛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임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폭 안겨오는 데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아이가 내내 기다렸던 것,

그러나 오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가

가슴으로 느껴졌다.



버려진 아이들을 안아주는 일을 하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기라고 해도

그 시간동안 세상에 너무 깊이 상처 받은 아이는

처음 안아주기 시작할 때

몸이 뻣뻣하다고 했다.

안아도 안겨오는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안아주고, 또 안아주다보면

어느 순간 뻣뻣했던 아기가,

아직 자신의 손과 발도 움직일줄 모르는 아기가,

온 몸으로 안겨오고 안아주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뻣뻣했던 아기가 온 몸으로 안겨오는 순간,

그럴 때면 선생님은

세상이 자신을 안아주는 느낌도 받는다고 했다.

그 곳에 '봉사'라는 이름으로 계속 가는 이유도

그 순간이 뭉클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안아주러가는 것이 아니라

안기러 가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 즈음 우연히 표창원 의원의 책에서,

역시 오래 잊혀 지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분은 자신과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은 범죄자의 인생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 범죄자는 자신과 이름도 같았고

나이도 비슷했고 어린 시절 경험한 결핍과 좌절,

그리고 환경도 같은 면이 많았다고 했다.


그 분은 자신의 삶을 놓고 질문을 던졌다.



'여기 비슷했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사회의 질서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감옥에 갇혀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표창원 의원은 그 차이를

어린 시절 힘들고, 서럽고, 고통스러워

세상에 대한 독기 어린 원망과 분노에 가득 차

혼자 울고 있을 때,

주변에 손잡아 주고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찾았다고 했다.


그 분께는 부모님이 싸우거나,

어디선가 혼나고 와서,

혼자 울분 속에서 씩씩거리며 울고 있는 때,

가만히 안아주시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손 잡아주고 안아주는,

품을 내주는 어른이 있었던 것이다.


품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마음 속 춥고 날카롭고 외로운 마음을

안아주는 품이란 것은...

아마도 그런 따뜻한 품 속에서 울다보면,

그 누구의 마음 속 칼도,

자신과 세상을 향해

겨누는 동시에 찔리던 날카로움도,

자연히 물처럼 흐물흐물 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그 불행감을

원망이나 분노로 세상에 되돌려 주기보다는

자신도 불행한 사람들을 손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창원에서 표창원을 보고

표창원에서 신창원을 보게 된다.


그 누구의 삶도 홀로 외따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 품이 필요하므로,


안아주는 것이 안기는 것이고,

한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온 세상을 안아주는 일,

또 온 세상에 안기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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