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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Oct 11. 2021

그녀의 아파트 한 채는 그냥 아파트 한 채가 아니었다

타인의 삶이 내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마주치는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계신다. 그녀는 열성적인 태도로 모든 사람들의 일에 관여한다. 물건을 파는 것과도 무관한 많은 일들에 말을 보태고 손을 흔들어주신다. 깍뜻하고 열성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으실까.




그런데 그녀의 흐름 가운데 내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녀의 많은 말들이 ‘아껴야 한다’로 귀결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친절하고 깍뜻하던 그녀도 ‘아껴야 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일순 독재자가 되는 듯했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와 마주쳤을 때에도 그랬다. 그날도 그녀는 나에게 ‘아껴야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버튼을 두 곳에서 누르게 되어있는데, 어린아이들이나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누르기 쉽도록 왼편의 엘리베이터 버튼은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몇 번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낮은 곳에 위치해있는 버튼을 누르려다 그녀에게 일장 연설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논리는 이러했다.

아래쪽에 위치한 버튼은 추가로 만들어진 버튼이기 때문에 그 버튼을 누르면 자동적으로 돈이 1원이라도 추가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 그 비용이 우리의 전체 관리비에 그 비용이 반영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쪽 버튼을 누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친절하고 깍뜻하던 그녀도 ‘아껴야 한다’는 말을 할 때에는 일순 모노톤의 구호를 반복하는 독재자가 되는 듯했다.




"우리 경제가 어렵습니다.

"무조건 아껴야 합니다.

"이게 다 돈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버튼을 누르세요.




아이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하면서 아래쪽 버튼을 누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녀에게 두 번쯤 핀잔을 듣고 나자 그때부터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를 마주하면 불편해졌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쓰기 위해 있는 버튼 한번 누르는 행위에도 세세한 경제적인 효율을 따져가며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태도에서 아마도 나는 그전까지 내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떤 죄책감의 무게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 싫었던 것도 같다.





누군가의 강한 경직된 신념은 이렇게 관계 속에서 단절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 안에는 한순간에 경직되는, 집결되는 어떤 강렬한 마음이 형성되는데 때로는 이것이 의지가 되고 결심히 되고 신념이 되지만 또 이런 강렬함은 벽이 되고 단절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런 경직과 단절은 그 사람 내면의 상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 말의 기원과 역사가 분명히 있다.






어제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를 마주한 나는 일단 오른편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그분께 이런 질문을 했다. 큰 의도 없이 그냥 한 질문이었다.



“여기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6년이요,”




그런데 그 말을 기점으로 그녀는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나를 보며 아주 환한 표정으로 이런 얘기를 하셨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16년이 되었어요. 그때 그렇게 했기에 지금 여기에 살 수가 있지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자신의 현관문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아껴야 한다는 말을 모노톤으로 반복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연결점이 바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자,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 또 사람들이 물어봐주길 기다렸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내내 하는 ‘아껴야 한다’는 구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분은, 16년 전, 생활 전선에 뛰어드신 것 같았다. 지금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분께, 요구르트 아줌마로 16년, 이라는 것은 40대에 시작하는 몸을 쓰는 노동이다. 그 하루하루가 어땠을까. 그 일을 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어쩌면 밀려나서 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밀려나지 않았고 자기 현실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루하루를 촘촘히 쌓아 올려 아파트 한 채를 점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했기에 지금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그 말속에는 아끼고 아껴서 이룬 어떤 삶의 지평, 삶의 부피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의 아파트 한 채는 그냥 아파트 한 채가 아니었을 것 같았다. 전체 관리비가 1원이라도 늘어날 것을 경계하는 경직되고 축소된 삶이지만 결국 자유롭고 충만한 삶이기도 하다.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숙연해졌다.




그녀가 절실히 매달리고 간절히 실행해온 삶의 태도와 자세가 ‘아껴야 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담겨있다. 어쩌면 상처로 점철되어 하기 시작했던 그 말이, 결국에는 그녀의 자부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나는 그녀가 아끼자는 구호를 모노톤으로 몇 번씩 너무 힘주어서 말해도, 듣기 힘들지는 않을 것도 같았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조금은 더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냥 들린 말이든,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말이든, 말의 배경음을 인식하고 나면,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식도 없이 내 내면의 어떤 장벽이 무너진다.




타인의 삶이 내 안에 스며든다.

어떤 말이든 ‘있는 그대로’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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