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남편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마른빨래를 함께 개키고 있는데 남편이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일이 찾아오더라도 나에게 뭔가를 더 잘해줄걸 자책하지 말기로 해요. 난 받을 건 충분히 다 받았으니.”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는 세 명의 어린아이들과 다섯 식구 분의 빨래 더미가 있었다. 다른 질문이나 설명 없이 가장 하고 싶은 대답만 덧붙일 수 있었다.
“나도 이하 동문.”
대화는 짧고 담담했지만 또 깊고 다정했다. 그리고 나는 이 속에 우리 만남의 본질과 목표가 담겨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별의 순간 받을 것 다 받고 줄 것 다 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 잘 만났기에 잘 이별할 수 있는 사이.
모든 만남은 이별을 예비하고 있고 모든 이별에는 만남의 본질이 담겨있다. 만남과 이별의 순환이 이토록 긴밀하기에 우리는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안녕’이라고 같은 인사를 한다. ‘있을 때 잘하라’고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하고 결혼식장에서 보다는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길에 삶의 의미와 사랑의 방식을 더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 잘 잊고 잘 속는 데다가 빨래 더미처럼 쌓인 수많은 일상의 과제들에 압도되어 그 소중한 것을 잊기도 쉽다.
못다 준 사랑을 회수해야 할 수밖에 없는 막막하고 냉정한 이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우리는, 잘 주지 못했음을, 잘 받지 못했음을 성찰하고 이파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남은 마음, 남은 사랑과 함께 홀로 남겨지게 되었음에 가슴을 치게 된다.
이제 막 이별한 사람만큼 만남에 대한 주옥같은 통찰을 전해주는 사람도 없는 법. 시어머니와 이별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차갑게 날이 선 내 마음을 다시금 말랑말랑하게 적셨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했던 건
그저 사랑 주고 사랑받는 것이었을 뿐일 텐데, 남는 것은 결국 못 다 준 사랑밖에 없는데,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시간을
가까워지려 애쓰기보다는
너무 가까워져지지 않으려 하는 데에
마음을 썼을까요.”
미처 전하지 못한 남은 사랑이 회한과 자책, 미련으로 전환되는 것을 들으며 내 안의 사랑을 차갑게 얼려 보유해두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마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어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아낌없이 주고, 받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이별 후 남는 사랑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