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클라라와 태양
부제: 영원한 청춘을 위한 진혼곡 – 존재의 자기 승인, 정동, 서정, 사랑
*일러두기. 나는 음악 전공자가 아니므로 크라잉넛에 대한 개인적 감상만 담았다. 크라잉넛의 더 멋진 곡들을 들어달라.
90s 불안한 한국,
크라잉넛의 탄생
1995년, 당신은 홍대 클럽 '드럭'에 있다. 오늘 무대에 서기로 한 밴드가 신참이라는 사실에 다들 고개를 돌리고 데낄라를 마신다. 그때 들려오는 거칠고 반항적인 메세지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크라잉넛은 그곳에서 결성됐다.(이상혁, 이상면, 한경록, 박윤식 등 시작으로 2001년 김인수가 합류했다.)
크라잉넛이 등장한 한국의 1990년대 음악계는 록 장르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며 끝없이 올라가는 서울 집값, 한국 특유의 입시 경쟁, 청년 실업, 대규모 구조조정 등 제도권이 더이상 역할을 하지 못했던 시기에 록은 더욱 각광받았다. 대체로 록은 홍대 인디 씬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불렸고, 시민들은 식당에서, 술집에서, 클럽에서 입을 모아 정치를 말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구호가 경제 살리기 운동으로 바뀌고, 경제 살리기 운동은 제도화된 양극화로 정착됐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을 향해 크라잉넛은 그래도 당신의 청춘, 정말 아름답다고 말했다. 크라잉넛은 펑크록의 형식을 빌려 망가져 가던 청춘을 '우리'의 이야기, '나'의 고백을 노래했다. 크라잉넛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으로 번지고 공감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바가 불만도, 분노도 아닌데, 우리는 자꾸 가사에 끌린다. '청춘'을 제도 바깥으로 밀어낼 때, 그들만이 '청춘'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었을 터.
크라잉넛은 펑크록을 통해 청춘을 이데올로기에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정동적 저항을 자기 고백으로 전유하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Seyn) 양식이자 능동적 주체로 호명한다. 그들의 음악은 말하기 힘든 시대적 상처에서 공감이라는 주체 간 윤리를 길어냈다. 우리는 가사 앞에서 비로소 진실을 위해 말문을 연다. 너도? 나도 그랬어.
청춘을 위로하거나 다그치려는 제도와 어른들에 대해 크라잉넛은 외친다. '닥쳐!'(<말달리자>, 「말 달리자」, 1998)
변치 않는 하나의 진실
<말 달리자>가 가리키는 것
MP3에 이어폰을 꼽고 오래 된 펑크록 한 곡을 튼다. 가수는 필사적으로 ‘말 달리자’(<말 달리자>, 정규 1집 「말 달리자」, 1998)고 노래한다. 동물 말을 의미하는 건지 사람의 발화인 말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는 ‘말’에 대해 상상했다. 자, 여기 마구간에 서성이는 말 한 마리가 있다. 말은 생각한다. ‘지구는 ‘띵굴띵굴’하니 마음껏 달려도 제자리로 돌아올 텐데, 사람은 왜 날 가두는 걸까?’ 그때 모자를 쓰고 먹이를 주러 온 주인이 눈에 들어온다. 두 손 가득 볏짚을 짊어진 모습을 보고 그는 힘차게 소리 내 외친다. ‘에구... 녀석 배고팠구나...’ 주인은 먹이를 던지고 돌아갔다.
건너편 말은 그런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지만 그는 건너편 말도 친구로 생각한다. 친구는 냉정한 조언자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친구 가라사대: 더 이상 사람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아. 차 있으면 더 빨리 가지.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말을 부르짖는다.
닥쳐
/닥쳐/닥쳐/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 해/거짓에 싸워야 해
/말 달리자(반복)
<말 달리자>, 1998
말이 처한 상황을 우리로 치환하면 어떨까. 살다보면 그런거지/우후 말은 되지, 라고 냉소한다. 그뿐인가. 노래하면 ‘잊혀지나/사랑하면 사랑받나/돈많으면 성공하나’, 라고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에게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라는 현실적인 말을 툭, 던질 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이 세계에 속한 우리 모두 유폐됐다.(‘모든 것은 막혀 있어’) 그러나 ‘유폐’는 제도적 감금이 아니라, 자율성을 잃은 감정의 흐름이 차단된 상태다. 이는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정서의 경로 상실’이다. 감정이 사회적으로 돌아갈 통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사랑’은 더 이상 연결의 감각이 아닌, 고립된 감정의 환상이 된다. 그리하여 상처는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낸 구조다. 구조적 상처는 존재가 세계에 응답하는 과정의 산물로서 ‘정동’이다.
상처가 구조화된 장소에 선 우리는, 사회적 매개인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상처받기 쉬운 거야’라는 사회화된 언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실존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크라잉넛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우리의 내면을 쿡쿡 건드리는 <말 달리자>의 메시지는 하나의 방향으로 어떤 존재를 가리킨다.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말 달리자>는 세 겹의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연주된다. 세 명의 화자 - 1) 한없이 상처받기 쉽고, 2) 현실에 순응하는 법을 알면서도 3) 제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 개별자들이다. 존재들은 ‘우리’(는 달려야해)로 응축되며, 공동체에서 밀려난 객체가 아닌 고통을 긍정하는 주체가 된다. <말 달리자>의 발화는 경쟁사회에서 추방되고, 구조적 상처를 새긴 우리를 다시금 ‘인간’으로 부른다. 펑크록이라는 칼을 쥔 크라잉넛은 30년 전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고발했다.
<말 달리자>에서 나오는 ‘닥쳐’의 반복은 운율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 특정 언설이 사실 말해지기 어렵다는 역설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자주 아프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12번 반복해서 나오는 유일한 응답인 ‘닥쳐’는 강압적인 목소리라기보다 고통에 억눌려 울음을 막 터뜨린 감정과 다르지 않다.
반복과 대화성, 존재의 정동과 시공간성으로서 ‘밤’의 서정성, 그리고 윤리의 대안으로서 ‘사랑’은 펑크밴드 크라잉넛의 핵심 모티프로서 계속 변주되고 노래된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후 발매된 모든 앨범과 곡의 가사는 정규 1집 「말 달리자」(1998)에 수록된 타이틀곡 <말 달리자>의 각주에 불과하다.
미래의 거울상 『클라라와 태양』
‘대체 가능성’, ‘평준화’ 속 인간 존재
정동과 서정으로 묻는 인간의 조건
크라잉넛의 구조적 상처는 ‘대체’와 ‘평준화’의 병리학적 기전을 두고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속 핵심 모티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는 크라잉넛의 울부짖음이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가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소외가 문화 현상으로 전이됐다. 그 속에서 일상화된 소외를 겪는 ‘인간’이 서사를 직조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때 크라잉넛의 단말마(‘닥쳐’)는 제도권에서 소외된 인간 내면의 폭발로 바뀐다.
『클라라와 태양』 줄거리는 이렇다.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는 어린이를 위한 친구형 로봇(에이에프)인데, 인간 조시의 친구 역할을 맡게 된다. 병약해지는 조시를 위해 ‘태양’의 힘을 빌린다는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조시는 건강을 되찾고 클라라는 폐기된다.
소설은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경험되고 관찰된다.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조시의 어머니 크리시가 아픈 조시를 클라라로 대체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마치 ‘인간’은 오랜 시간 믿어온 미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 딸의 모든 데이터를 전송하면 대체할 수 있어, 식의 태도는 어떤 모습으로든 섬뜩하다. 크리시의 계획에 클라라는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아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또 하나의 질문. 인간의 마음은 뭘까?
2025년,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자본과 경제의 이름 아래 ‘대체’와 ‘평준화’라는 체제 논리를 사회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는 그러한 논리를 무의식으로 체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고유한 무언갈 전문적으로, 고도로 개발하여 인정받으라고 강요하는 사회다. 그 과정에서 경쟁은 필수동반자기도 하다. 그러나 끊임없는 경쟁은 그저 상향 평준화를 불러올 뿐이다. 그런 사회는 그저 그런 균일한 소수 엘리트의 집단 이익만 좇는다. 개별성이 사라지고 대체 불가능성을 부정당하기 시작한 건 개발독재 시대 노동 시장이 이중 구조화가 됐을 때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부터 대체 불가능성이 익숙한 허구임을 인지하고 제도화된 불안에 떨고 있었다.
크라잉넛이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크라잉넛은 일상이라는 낯익은 이미지를 쓰면서도 편안한 가사를 쓰지 않는다. 크라잉넛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2001)에서 ‘사랑이 무언지아니/슬픔이 무언지아니/난 지금 한국에 살아요/웃기지도않는이야기’라고 말하며 ‘세상사는게 그렇지/눈을 감으면 어둡지’라고 쓴다. 암담한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 암담한 현실을 경쾌한 발성으로 긍정한다. 이때 일렉기타 선율 위로 바이올린이 겹치고 드럼과 박수 소리가 포개지며 힘찬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체제의 논리 속에서 구속되었던 한국 사회의 ‘인간’을 그렇게 해방한다.
숨이 조금 차겠지만,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겠다. 무엇이든지 대체 가능하고, 개별성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이 달성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 클라라는 결국 폐기된다. 기술의 발전이 원인이 아니다. 경제와 자본 논리에 잠식된 제도와 고도화된 사회 탓도 아니다. 모든 건 우리 마음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클라라와 태양』 속 유전자를 바꿔 신체와 지적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향상’과 ‘대체’는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존엄’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우리는 이미 ‘대체사회’로 전진하고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안 오는 아이가 훨씬 많아. 더 심한 경우는, 아이가 다시 오긴 했는데 딱하게도 기다렸던 에이에프를 외면하고 다른 에이에프를 고르기도 해. 아이들은 원래 그래. 너는 늘 세상을 관찰하면서 많은 걸 배웠지. 이것도 잘 명심해두렴. 알겠니?”
『클라라와 태양』 中
에이에프를 대상화하고 인간 중심주의가 만연한 세계 속에서 비인간 사물들의 대항을 상상해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주목해야 할 장면은 『클라라와 태양』에서 대체와 향상을 대하는 ‘조시’와 ‘릭’의 대비다. ‘조시’는 철저한 엘리트 중심, 인간 중심사회에 길들여진 인물로 비인간 사물을 도구적으로 대상화한다. 그러나 ‘릭’은 조금 다르다.
모종의 계획을 수립하는 조시의 친구 ‘릭’. 그는 엘리트 과학자도 인공지능 로봇에게 밀리는 현실적 조건에서도 과학을 공부하고 새 모습의 드론을 설계한다. ‘릭’은 상류층에 편입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향상’을 받지 않았지만, 그런 자신의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릭을 병자처럼 외부인 취급했지만, 그는 사회가 지정한 경로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방향과 감정을 주체적으로 조직한다. 그는 담담하게 정동적 주체로 걸어간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릭의 태도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지만 새 모습의 드론을 만들어 저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존재로 도약한다.
『클라라와 태양』 텍스트에서 읽힐 수 있는 쟁점은 ‘권력의 이해에 봉사하라’라는 교묘한 질문 앞에 ‘지배 당하냐, 주체로서 응답하냐’라는 대답의 차이다. 이때 존재 개인의 정동이 감정의 차원에서 존재의 윤리로 발돋움하게 된다. 단순한 감정 생산에 그치지 않고 정동의 차원에서 세계와 감응하는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특히 ‘릭’과 ‘조시’의 대비는 크라잉넛의 존재로서 정동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지배적 체제로서 ‘대체’와 ‘향상’을 추구하는 ‘조시’와 달리 릭에게 ‘향상’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릭의 ‘정동’은 존재 자체를 존중할 때 가능하다. 정동이 세계에 복종하지 않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이 지점이야말로 크라잉넛의 정동과 연결되어 있다. 크라잉넛은 시스템의 바깥으로 끌려 나간 자들의 감정의 흔적을 펑크록의 형식으로 구조화한다. 그 펑크록으로 크라잉넛은 기어이 정동을 통한 존재 방식의 윤리적 대안을 질문한다.
평준화와 대체의 감각은 크라잉넛의 음악 속 ‘우리’라는 주체의 불가능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클라라와 태양』이 그리는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은 크라잉넛이 반복적으로 노래해온 ’청춘‘의 실존과 맞닿아 있다. 자, 이제 중요한 얘기, 크라잉넛과 ‘청춘’을 말해보려고 한다.
크라잉넛이 말하는 ‘청춘’에 대하여
상상력으로 환원되는 서정의 힘
이제 공간을 바꿔보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벌써 ‘밤이 깊었’다. 나는 ’이 밤에 취해 흔들리고‘ 있다.(2001, <밤이 깊었네>, 「하수연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명동거리에 서 있다. <명동 콜링>(2006, 정규 5집 「OK 목장의 젖소」)의 ‘나’가 걷는 장소로서 ‘명동거리’도 ‘대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불안한 자아를 보여준다.
크라잉넛 한경록이 작사한 이 가사는 존재의 결함을 보이는데 멈추지 않는다. 가사의 주인공인 불안한 존재는 가히 초월적 변증법(유성호)을 통해 ‘청춘’으로 승화된다. ‘크리스마스 저녁 명동거리’에 밀착된 그의 시선은 밤하늘 보름달로 이동하며 상상력으로 전환된다. 이제 ‘나’는 영화가 되고, 나의 궁전으로 솟구쳐 오른다.
(...)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바람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는
/나의 조각배야
/갑자기 추억들이 춤을 추네
<명동 콜링>, 2006
지상에서 상상으로 도약하는 계기는 ‘나’의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명동거리를 걷던 나는 쇼 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는 거울 속 스스로를 보고 부정한다.(‘인간이 아냐/믿을 수 없어’) 그 사이 시간은 저녁에서 밤으로 바뀌고 자연스레 ‘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은 서정성을 띠게 된다. 벤야민에 기대어 생각컨대, 밤이라는 가사의 시공간은 ‘몽상적 현재’다. 과거의 정동이 현재의 감각으로 느껴질 때, ‘나’는 ‘몽상’을 통해 서정을 획득한다. ‘나’는 청춘의 1인칭 단수다.그래서 ‘나’의 언술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정서적 층위는 서정성으로 변모한다.
지상의 추억과 상상이 빚어내는 서정성의 관계는 대등하다. ‘달링’을 ‘나’의 궁전으로 불러 들이려는 간절한 외침(‘보고 싶다/예쁜 그대/돌아오라’)은 지상에 밀착되어 있다. 발화의 종국마다 상상력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저 나는 ‘추억들이 춤을 추네’라고 담백하게 진술한다. 이때, 존재가 느끼는 정동은 서정의 차원으로 승격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느낌의 공동체』 6부 「만나지 말아야 한다」에 따르면 오랫동안 서정은 만남의 기록으로 간주되어왔다. ‘자아와 세계의 만남, 주체와 타자의 만남,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라고. 신형철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보자. 나희덕의 시처럼 엇갈림을 견디지 못하거나 깊이 사무치는 시가 있다. “흐리거나 추운 날을 가려/나 그대에게 가리/(...)/바람이 불쑥 칼날을 내어미는 날에도/바람에 눈이 찔린 나무들이 되어.(「연가」, 『뿌리에게』) 나희덕의 시는 나와 그대 간엔 ‘애틋한 거리’가 희망을 부둥키며(’굳이 흐리거나 추운 날을 골라 떠나는’) 세상과 나의 조우를 기꺼이 실패한다.(신형철, 문학동네, 「그리워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 『느낌의 공동체』, 2011)
당신이 <명동 콜링>이 크라잉넛의 서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곡으로 꼽았다면, 이 애틋한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까닭일 테다. 응큼하게 ‘나의 궁전’을 운운하며 ‘예쁜 그대’라고 부르는(Calling) 수작은 뻔하고 애틋하다. 떠난 ‘달링’은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계시지만, ‘밤의 인간’으로서 나는 ‘상상’한다. 예쁜 그대와 나 사이의 크레바스는 상처로 남지 않고 서정으로 전이된다.
현실을 응시하는
정동의 윤리,
약동하는 청춘
크라잉넛 서정시의 시공간은 이제 어둡고 빛나는 우주로 날아간다. 진작 크라잉넛은 <마시자>(2006)에서 지친 청춘의 이미지에 고정되지 않고, 약동하는 청춘으로 초점을 이동해 노래했다.(‘한잔 더해야지(해가 뜨기전에)/당췌 집엔 언제 갈거유’) 이때의 ‘부어라 마셔라’는 삭막한 현실에 발을 깊이 밀착해 살아가는 ‘우리’를 그린 거라면, 개별자로서 ‘나’의 꿈을 그린 곡도 있다.
<순이 우주로>(2006)는 ‘나’는 ‘소주 한잔’ 물다 ‘빙빙 도는 이 세상’을 감각하고 ‘저 우주로 떠나간다 영원히’. 우주에서 바라본 세상은 별들이 반짝이는 곳이 아니라 깜빡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너를 생각한다. ‘꽃다발을 전해주던 내 모습(잊었나)’라는 두 겹의 목소리를 통해 허탈감을 대화적으로 구성한다. 우주의 나는 ‘외로운 술래’지만 우주는 ‘콧노래를 부르던 날’ 떠올리는 장소기도 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멜로디
/그 멜로디
/그 멜로디
/그 멜로디
<순이 우주로>, 2006
그렇지만 크라잉넛이 부르는 청춘이 단지 닳고 닳는 존재는 아닌 듯하다. 크라잉넛에게 청춘은 예찬의 대상이다. ‘청춘’은 클라라처럼 다른 로봇보다 조금 부족한 모델이거나 대체 가능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크라잉넛은 구경꾼으로 청춘을 바라보지 않는다. 시적 개별화된 대상을 ‘우리’로, 청춘으로 묶어 노래한다. 크라잉넛에게 청춘은 밴드의 정체성 자체다. 그들의 태도는 청춘의 밤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함께 노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래가 그렇고, 소설이 그렇고, 시가 그렇다.
조금 다른 이야기. 작가 이장욱에 따르면 세계는 완강하고 미학은 유약하다.(창비, 「책머리에」,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이장욱, 2005) ‘일상’이라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은 도시 뒷골목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협소한 골목에서 데카당스와 술로 스스로를 지탱했다. 그 이후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청춘의 단면이 이토록 닮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크라잉넛이 부르고 불러왔던 곡의 가사들은 청춘을 지배하는 억압된 ‘운명’이며 지배를 예감하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라잉넛은 청춘에게 새겨진 미래의 인장에 대해 비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청춘의 서정을 가능케 한다.
크라잉넛의 음악은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존재의 상처와 억압, 해체된 주체는 그들의 리듬과 가사에 ‘스타일’로 편입되고, 따라 부르며 ‘청춘’이라는 ‘소속’의 실천이 된다. 우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내면을 응시하고 투영된 감정을 노래한다. 이것은 반영이 아니라 정동의 끊임없는 재생산이기도 하다.
곤혹스러워서, 화가 나서, 억울해서, 우린 취한다. 기뻐서 취해 본지가 언제인가. 크라잉넛은 다만 이렇게 조곤조곤 말한다. ‘괜찮아’(5분 세탁, 「FLAMING NUTS」, 2013) ‘괜찮아’는 이 시대의 실패한 자를 위한 윤리의 문법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Post Corona, 뉴 노멀 New Normal이라고도 한다.)로 살아가는 우리는 정치와 권력이 생명을 규율하려는 시도를 목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크라잉넛은 존재의 생명이 가장 취약한 순간조차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규율의 언어를 거부한다.
니가 취하고 비틀대도/방황하고 실수해도
/똑같은 실수를/반복하고 무너져도
/괜찮아 누구나/한번쯤은 바닥치니
/죽는단 말대신/웃는단 얘길해봐
<5분 세탁>, 2013
여기서도 크라잉넛은 반복으로 서정성은 청자의 마음을 차츰 두드린다. ‘괜찮아’는 15번 반복된다. 그 뒤에 ‘오늘은 살아있네’라고 달랜다. 그 말들은 청춘만이 말할 수 있는 윤리기도 하다.
크라잉넛은 불안한 청춘에게 정동의 윤리를 끊임없이 귀띔하고 승인한다. 크라잉넛에 따르면 넘어지고 울고 ‘어지러운 네 방’을 허용할 수 있는 건 청춘의 특권이다. ‘우울해진 머릿속을’ 얼마나 깨끗이 청소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술을 ‘한잔’하고 넘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든지, 괜찮다. ‘고장난 시계도/시간은 흘러가’니까. 어찌됐든 ‘오늘은 살아있’으니까 괜찮다. 불완전하고 망가져 버린 마음에 대해 그저 계속 괜찮다고 괜찮다고 소리친다. 거기에 아무런 사회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과 사회의 사이, 예술과 자본 사이, 현실과 희망 사이에 개입되어 펑크록은 서정시의 장르로 성취된다.
청춘의 윤리는 괜찮다고 선언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크라잉넛은 윤리의 대안을 꿈꾼다. 이미 닳고 닳아 질서에 순응한 이들은 다른 이의 상처를 외면하거나 구경한다. 무의식적으로 질서에 복종한 이들은 삶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공동선이라 믿으며 나는 이타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삶의 덕목엔 무언가 나사가 빠져있다. 그곳엔 실패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고, 무너지고 쓰러져도 봄이 올 거란 믿음이 없다. 거기엔 서정이 없고, 서사가 없고, 청춘이 없다. 그들은 상처를 드러내는 이들을 ‘잘못하다’ 밟은 레고 조각처럼 불편하게 여긴다. 청춘은 그런 자신을 알고 있다. 그때 그들을 향해 외친다. '이세상에 부러운건 하나있지/사랑이야'(<레고>, 2013)
사실 지금 난 달 볼일 없겠지만
/언젠가는 내 사랑을 만날거야
/우리들이 서로 잘 끼워 맞춘다면
/이 세상에 모든 부러운건 없지
/이세상에 부러운건 하나있지
/사랑이야
/사랑이야
/사랑이야
/사랑이야
<레고>, 2013
달려간 그 자리
서정에서 윤리로
그 이름, 사랑
지금 우리는 어디로 달리고 있는가. 크라잉넛은 여전히 달린다. 이제는 그들을 부르는 누구든 ‘번개처럼 달려’간다.(2002, <퀵서비스맨>, 「고물 라디오」) 다만 이제 그들의 배달통엔 ‘사랑’이 들어있다. 그 사랑은 도구화된 객체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는 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진단한 비슷한 정황 속에서(‘너무 빨르면 안되거든요’) 크라잉넛은 탈이성으로서 사랑을 가져오겠다고 선언한다.
정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전화주세요
/번개처럼 달려갑니다
/제가 직접 사랑해드려요
/이제는 천천히
<퀵서비스맨>, 2002
여기서 ‘천천히’라는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퀵서비스맨이 직접 사랑을 드리는 행위도 의심스럽지만(왜?), 이것은 추후 되풀이될 진술인 ‘괜찮아’의 모태에 가깝다(아하!). 크라잉넛 음악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밤’과 관련한 사물들(별, 달, 술, 취한 모습 등)과 ‘달린다’가 분명하게 소외된 청춘의 정동(또는 서정)을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도에 대항 반항과 ‘청춘’이라는 소속의 어우러짐은 일종의 객체가 되어 버린 존재를 주체로 호명하는 시적 태도라고 할 만하다. 다시 말해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달려가겠다는 약속은 ‘실패한 청춘’에게 보내는 크라잉넛만의 능동적 실천의 편지다.
크라잉넛의 펑크록은 윤리적이다. 크라잉넛이 변주해온 정동의 윤리는 냉철한 해석자가 되거나 친절한 설명자의 모습과 다르다. 그들의 윤리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내는 실존의 ‘태도’에 가까웠다. ‘괜찮아’라는 반복되는 말은 타자화된 위로가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세계에 던져진 채 존재를 돌아보는 현존재(Dasein)의 언어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가 말하지 않았거나 말해주지 못한 감정의 밑바닥을 감각하며, 청춘의 윤리로서 가사는 서정의 언어가 된다.
크라잉넛은 ‘우리의 인생이 여기까지인 듯’ ‘마지막 한 잔까지’(<내 인생의 마지막 토요일>, 「리모델링」, 2018) 채우자고 모두를 축제에 초대한다. 크라잉넛의 가사 속 ‘나’라는 1인칭 단수는 고통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에도 나와 같은 1인칭 복수 ‘우리’가 있을 거라 믿는다. 그때 세계로 로큰롤(Rock’n Roll)은 퍼진다.
통시적으로 보았을 때, 크라잉넛의 장르는 청춘의 윤리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거의 신앙에 가까운 청춘에 대한 믿음은, 계속 변주되고 노래 되어왔다. 다시 말해, 크라잉넛은 사회정치적으로 억압된 청춘을 노래한다. ‘대체’와 ‘평준화’라는 체제가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크라잉넛은 고유한 청춘의 생명력을 짚어내고, 그러한 청춘의 정동을 서정적 리듬을 실천한다. 크라잉넛을 통해 청춘은 당당한 존재 방식으로 승인되고, 그 과정이 점증적으로 그려진다.
한국 인디 씬, 그것도 청춘예찬 펑크록을 하는 크라잉넛이라면 안정된 환경이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베이시스트 한경록은 크라잉넛의 28년을 회고하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는 없었냐는 질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음악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가요 순위 차트에서 1위 해야지, 순위권 안에 들어야지, 이 가수를 이겨야지’ 이런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음악하는 순간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과 비용을 써서 무대에 와주신 관객과 호흡하는 순간이 제게는 행복이고 감동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25년은 크라잉넛의 30주년이기도 하다.(「크라잉넛 28년…“홍대 펑크는 ‘가요 톱텐’ 1위보다 소중”」) 30년의 시간 동안 크라잉넛은 자신의 음악처럼 생존의 미학으로서, 윤리적 실천으로서 우리 곁을 지켜왔다.
크라잉넛의 음악을 ‘영원한 청춘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본다면, 크라잉넛 음악 속의 청춘은 문학성이나 사회성이라는 정의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경계에서 계속 떨린다. 크라잉넛의 목소리 안에서 ‘청춘’들은 떨리면서 걸어간다. 그러나 크라잉넛의 ‘청춘’은 무책임하게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그들의 가사에서 ‘청춘’은 새로운 정치적 감각의 지형으로 재구성돼 존재의 윤리로, 예술로 승화된다. 그것이 바로 크라잉넛의 ‘진혼곡’이다.
여기서 청춘은 바로 그들을 듣는 우리고, 그들 자신이다. 크라잉넛의 음악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저기, 펑크 장례식이 열린 공간을 보라. 죽어간 젊음들이 누운 관들이 흰색의 복사들 사이로 지나오고 있다. 우리는 자리에 일어나 죽어간 젊음에 대해 애도하자. 그리고 관을 내려놓고 올라가 춤을 추자. 술을 마시자. 노래하자. 모두 다 추억이 되네.
참고문헌
1.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민음사, 2021.
2.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3. 이장욱,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 창비, 2005.
4. 나희덕, 『뿌리에게』, 문학과지성사, 2001.
5.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예출판사, 2001.
6. 크라잉넛, 말 달리자, 드럭 레코드, 1998.
7. 크라잉넛, OK 목장의 젖소, 드럭 레코드, 2006.
8. 크라잉넛, FLAMING NUTS, 드럭 레코드, 2013.
9. 한경록, 매일경제 인터뷰, 「크라잉넛 28년… “홍대 펑크는 ‘가요 톱텐’ 1위보다 소중”」, 2023.12.22,https://www.mk.co.kr/article/10893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