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열여덟 번째 이야기
처음으로 여행이 아닌, 살아보겠다고 짐을 싸 가지고 유럽 땅에 발을 내디딘 곳은 스페인 세비야였었다. 마드리드에서 약 일주일을 보내고 새로운 삶의 터전인 세비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었다. 기차 전광판에서는 세비야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거침없이 올라갔고, 약 10도가 겁 없이 훅훅 올라가는 전광판을 보며 “말도 안 돼”라는 말을 혼자서 연신 내뱉었었다. 그렇게 도착한 세비야의 Santa Justa 기차역에서 밖으로 나오자, 숨이 딱 막히는 더위가 온몸을 감쌌었다. 다행히도 세비야의 집들은 그 무더운 여름을 대비해서 지었기에, 집에 들어오면 오히려 훨씬 시원했다. 하루가 아깝다고 세비야에 도착하고 난 그다음 날부터 부지런히 세비야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었다. 작고 좁은 골목골목 사이에서 들려오는 구슬프면서도 강렬한 플라멩코 음악들이 내 귓가에 들려오면서 진정 플라멩코의 심장부에 왔음을 실감시켜 주었었다.
그렇게 너무 착실하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내게 “시에스타 Siesta(점심을 먹고 잠깐 쉬어주는 낮잠 시간)”라는 것은 걸치적 거리고 익숙지 않은 개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상점들이 이 시에스타 Siesta시간에는 문을 닫았고, (한국에 있을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일하게 이 시간을 활용해서 갈 수 있는 곳들은 박물관들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에스타 Siesta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서 스페인 어학원을 마치고 나면,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박물관들을 찾아다녔었다. 그렇게 박물관들을 쏘다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어느 날 오후, 유난히도 태양 빛이 강하던 날이었다.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내 등 뒤로 살갗이 익는 느낌이 들고, 현기증이 났었다. 우연히 지나가다 보게 된 전광판에는 기온이 57도라고 표시가 되었고, 이를 보며,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50도가 넘을 수도 있는 거야? 하는 심정이랄까? 어쩐지 살갗이 타는 느낌이라더라니,,,,, 길가 한복판에 쨍 볕을 받으며 덩그러니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었다. 역시,,,,나처럼 겁 없고 뭐 모르는 관광객들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왜 세비야 사람들이 왜 시에스타 시간을 갖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었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10년을 유럽에서도 가장 남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여름을 지내온 여자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덥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하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렇게 장담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이번 여름을 지내면서 깨닫게 되었다. 세비야에서 지낸 2번의 무더운 여름 이후에는 지금의 나의 인생의 동반자인 이탈리안 셰프 남편을 만나, 그가 바캉스 시즌에 일하는 바닷가인 스페인의 카디스 Cadiz 근처인 Zahara de los Atunes에서와 남부 포르투갈 지방인 Algarve에 있는 Armacao de pera에서 지냈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어도 바닷가이기에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고, 해가 지면 기온이 서늘하게 내려가기 마련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남부의 집들은 무더운 여름을 대비해서 시원하게 집을 만들었기에, 아무리 더워도 집에 들어오면 꽤 시원했었다.
그런 반면, 올해는 집시의 집인 카라반에서 보내는 첫 여름이다. 카라반이나 캠핑카는 지금처럼 무더운 7-8월의 여름에는 보통 집처럼 외부와의 차단이 충분히 되지 않기 때문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놓거나, 바닷가가 아닌 이상 더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전기를 태양열판을 사용하기 때문에 완전히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주차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낮 11시부터 오후 4-5시까지의 무더운 열기를 식히는 방법은 바닷가나 근처의 호수에 가거나,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는 일 밖에 없다. 이렇게 무덥다 보니, 식단 또한 예전과 현저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되도록 점심식사는 신선한 샐러드나 야채들, 불을 쓰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제철 음식들을 만들고, 물기가 많이 함유된 과일들이 손에 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 전통음식인 가스파쵸 Gaspacho나 살모레호salmorejo, 멕시코 음시인 과카몰레 guacamole, 오이와 토마토를 곁들인 샐러드나, 초간장에 발효한 오이지나 피망 절임, 김치, 독일 음식인 양배추 절임, 간단한 샐러드 샌드위치, 중동 지역의 음식인 휴무스humuse 등등이다.
이곳에 오고서야, 제철 음식을 왜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는 것과 내가 어디에 있는 것과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더운 남부 지방에 있었지만, 시원한 집이 지켜주는 안락처 안에서 나의 감각은 생각했었던 것보다 무감각했었고, 이로써 무감각한 나의 몸에 더운 음식들을 집어넣었었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날씨가 덥거나 약간 서늘해진다던가, 밤 기운이 꽤 쌀쌀하다던가 하는 매우 작은 기온의 차이들도 피부로 느끼게 되고, 이에 반응하고 순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 나가고 있다. 이렇게 조금 더 자연이 내 몸에 에고 Ego가 아닌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사람과 동물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내게 조금씩 열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