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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arling Sep 12. 2019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018 열여덟 번째 이야기

첫째 아이가 만 5개월이었을 때 일이다. 그 당시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은 스페인의 남부 바닷가 Zhara de los Atunes여름 4개월동안만 여는 레스토랑을  다시 열기 위해 갔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아이와 나와 함께 내려가기 위해 남편이 세비야 Sevilla에 돌아왔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이 터졌다. 동업자 중 한 명인 나쵸 Ignacio와 함께 은행에 다녀와서 창백해진 얼굴로 나에게 떨리는 손으로 돈뭉치를 주며 세어보라고 얘기했었다. 그가 얘기한 대로 세어본 액수를 들은 내 남편은 나쵸 Ignacio가 자신의 개인 돈을 훔쳐갔다며 베이스 볼 방망이를 가지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런 다혈질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을 막기 위해서 그의 전 여자 친구이자 이성적이고 믿을만한 변호사이며, 나쵸 Ignacio를 원래부터 싫어하던 바네사 Vanesa에게 전화해서 그를 막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다행히 집에서부터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에 약간은 차분해진 나의 다혈질 남편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방망이를 던져 와인병들을 싹 부숴주시고 주방 쪽으로 도망가는 나쵸 Ignacio를 맞추기 위해 와인병 하나를 더 부숴버렸다. 뒤늦게 그의 다른 동료들이 그를 막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누구 하나는 병원에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25년간의 우정과 13년의 동업관계는 깨지고, 남편은 스스로 자신의 세비야 레스토랑의 지분을 팔고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1년 전부터 떠날 생각으로 여러 군데 알아보고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생각은 아니었고, 남편이 스페인의 남부 바닷가 쪽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중이어서 집 정리하는 게 만만치는 않았다. 급하게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게 되었지만, 막상 떠나기로 마음을 먹으니 감정적인 면보다는 실질적인 일들(집 정리, 짐 정리 등등)이 우선이었다. 마침 아는 분이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어, 급하게 우리 집을 빌려드리고 있었는데, 그분에게 집을 포함해서(집주인과 집을 재계약하는데 8년 전 금액 그대로 하며, 남편의 이름으로 보증을 서주었다.) 침대, 소파, 테이블 등등 모든 가구들까지 고스란히 넘기는 걸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도 안 된 첫째 아이와 단둘이 3일 동안 세비야에 다시 와서 짐을 정리한다는 건 꽤나 큰 모험이었다. 이래저래 어질러진 온 집안을 기어 다니는 아이를 보며 버릴 물건들과 친구들에게 넘길 물건들과 가져갈 물건들을 분류해야 했었다. 나야 스페인에 온 지 몇 년 안되었고, 그나마 집을 3번을 바꾼지라 짐을 늘이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한 결과 별로 없었지만, 남편은 13년을 살아온 세월과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답게 나보다 4배는 족히되는  옷들과 6배 정도 되는 신발들이 옷장에서 나를 버젓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과 모자들은 언급하지도 않겠다.) 나의 미션은 15개의 상자 안에 우리의 모든 짐들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남편의 친구들에게 꽤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고, 10미터 조금 넘게 줄지어지는 버려질 물건들을 밖으로 내놓고(그 당시 우리 집은 4층과 5층으로 구성된 2층 집이었으니,,,,,마지막 날 힘 좀 쓰는 남자 친구들이 도와주러 와서 어찌나 마음이 든든했던지,,,,), 3일 만에 모든 짐들을 15개의 상자 안에 꾸역꾸역 짚어 넣었다.


직접 색을 골라 손수 페인트 칠을 하고 새로운 얼굴로 탈바꿈 했었던 세비야의 집, Sevilla, Spain


그러고선 2달 뒤, 남편의 여름시즌 일이 끝나고, 남편의 가족이 있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기 위해 세비야의 우리 집이었던 그곳에서 하룻밤을 묶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었다. 다시 돌아온 집. 같은 장소에, 같은 가구들과 우리가 직접 색을 골라 페인트 칠했던 벽색이 여전한데도, 이제 그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남편과 나와 고양이들만이 차지하던 개인 옥상 정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드로잉을 하던 그 테이블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미친 듯이 재봉틀을 돌리던 나의 작업실도 이제는 내 공간이 아니었다. 겨울에 나무 장작을 넣어 열심히 불을 살려 따스하고 아늑하게 첫 아이를 맞이하던 우리의 보금자리 침실 방도 이제는 내 공간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가족과도 같은 마씨 Massi (현재에도 동업자로 포르투갈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살고 있다.)와 남편과 셋이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즐겨보던 거실도 이제는 내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나 마음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던 친구들에게 열려있던 이 곳은 더이상 내 공간이 아니었다. 고양이들이 즐겨 긁어대던 양탄자들도 이제 고양이는 부재하고(이탈리아로 미리 보냈다.) 주인을 상실한 양탄자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곤히 잠이 든 첫째 아이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기대고 남편과 얼굴을 마주한 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집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니야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인 나의 방, 나의 작업실, 나의 옥상 정원, 나의 부엌, 나의 거실, 나의 집이, 모든 게 예전과 똑같이 그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른 이의 소유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장소가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소유와 무소유의 차이 하나로 의미를 상실해 버리기도 해 버린다. 마음이 떠나 의미를 상실한 그곳은 내게 너무도 낯설은 얼굴을 드러냈다.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이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던 세비야의 집,Sevilla,Spain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이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던 세비야의 집, Sevilla, Spain


그리고 우리는 이탈리아로 날아가 다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나갔다. 남편이 떠난 13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그 공간을 거미줄을 떼어내고, 묵은 때를 벗겨내고, 나무 바닥을 다시 깔고, 새롭게 벽 칠을 하고, 조금씩 필요한 가구들을 채워나가며 우리들의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갔다.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임으로써, 어린 왕자에게 이 여우는 이제 수많은 다른 여우와 다를 바 없는 여우가 아닌,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여우가 된다. 그리고 여우에게도 어린 왕자는 수많은 다른 소년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아닌, 유일한 소년이 된다. 이처럼 우리들은 집이란 공간을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 그 의미를 내어 준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곳은 우리에게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되어진다. 그리고 그 의미가 사라져도, 그곳에서 공유했던 모든 기억들과 추억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물리적 공간의 의미는 사라져도 심리적 공간의 의미는 가슴속에 각자의 경험과 더불어 희미해질 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돌아와 13년간 버려졌던 공간을 모두 직접 손봐서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로부터 또 6년이 지나, 포르투갈 남부 바닷가로 베이스 캠프를 옮겼다. 또 다른 보금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색으로 벽 칠을 하듯 새로운 색의 삶을 또 구색해 나가고 있다. 얼마나 있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현재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며 고유한 향과 색을 내 삶에 조금씩 천천히 채워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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