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열아홉 번째 이야기
요즈음 아들 율이는 불을 가지고 노는 재미에 한창이다. 보통 부모님 같으면 "뭐라고? 불이라고?" 하고 경악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째 아들 율이는 만 2살 반 때부터 4년 동안 다녔던 이탈리아에 있는 숲 속 유치원의(이탈리아, 무엇이 나를 아쉽게 만드는가 https://brunch.co.kr/@anachoi/40 참조) 베이스 캠프에서 매일같이(우리가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기가 언제나 가을에서 겨울, 초봄까지 이므로) 모닷불을 피웠었기에 불이라는 존재를 잘 알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다. 숲 속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불을 피우고 싶으면, 불을 피울 수 있는 모와 부싯돌 등이 들어있는 상자를 직접 가지고 온다. 불이 잘 붙을 수 있는 얇은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중간 크기와 굵은 통나무들을 손수레에 실어와 불을 피울 준비를 다 함께 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불을 지펴 보기도 하고, 바람이 너무 불거나 기온이 너무 내려가면 서로가 다닥다닥 붙어서 바람을 막아주며 불을 피운다. 그렇게 조금은 긴 준비 과정을 거쳐서 피워진 불에 얼은 손과 발을 녹이기도 하고, 얇고 긴 나뭇가지들을 모아 와서 간식으로 사과를 불에 구워 먹기도 한다. 모닷불에 알밤을 구워 먹기도 한다. 장작이 타는 소리와 타면서 나는 각기 다른 나무향들을 맡아보기도 한다. 길고 얇은 나뭇가지를 찾아 직접 불을 지펴보기도 하고, 불이 붙었다가 꺼져서 아직 끝이 붉고 연기가 나는 나뭇가지로 허공에 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마다 있는 피자 타임 Pizza Time이 끝나면, 남은 피자 박스를 조각내서 모닷불에 던져 불을 (잠시) 키우기도 한다. 다 타고 검게 된 숯으로 바위나 나무, 종이, 손바닥이나 팔, 다리, 얼굴 등의 신체 부위에 낙서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 숲 속 유치원 아이들에게 불이란 존재는 그냥 무작정 금지된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무조건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왜 위험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고 자라게 된다. 그것은 위험하니까 그것은 금지되어 있을 뿐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새싹부터 잘라버리는 것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심리가 그렇듯, 금지된 것은 유혹적이고, 위험한 것은 짜릿한 스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불에 대해서 실험해보고 경험해 본다. 기억하는가? 어른들 몰래 어두운 지하실에서 숨죽이며 성냥개비를 긁어서 작은 불을 만들던 비밀스런 순간들을?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으고, 종이들을 잘게 찢어서 불이 피어오르는 그 경이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모두가 공동 범죄를 저지른냥 짜릿한 희열을 느끼던 그때를? 또한, 어릴 적 정월 대보름에 깡통에 숯가루를 넣어서 불을 지펴서 깡통에 이은 줄을 잡고 원심력을 이용해서 공중에 돌리며 불놀이를 하던 때를 기억하는가? 어두운 밤에 불의 움직임만이 보이던 그 경이적인 순간들을 기억하는가?
흔히, 네가 크면 다룰 수 있게 될 거라고 우리 어른들은 얘기하곤 한다. (마치, 대학 가면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듯이) 하지만, 이는 아이들에게 '너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네가 불을 다루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너에게 맡기지 않는 거야'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보다는 불이라는 성질이 어떤 것인지, 주변에 불이 붙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며, 불이 붙게 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 오히려 낳지 않을까? 불을 다룬다는 것이 아이들한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불이란 것이 잘못 다루면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충분히 인지한다면, 책임감을 가지고 불이란 존재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불이라는 존재에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원시시대 유인원이 처음으로 "불"이란 존재를 발견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불이란, 기적이나 마법처럼 일어나는 현상과도 같다. 또한,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너무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처럼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불의 덩치도 성냥개비에 붙은 불처럼 아주 작을 수도 있지만, 건물 높이만치 높이 쌓아 올린 나무장작들에 붙이는 축제의 불(Falò: 거대한 모닥불로, 정화와 봉헌 의식의 일부로 일부 기독교 종교 휴일에 이뤄지는데,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아직도 축제처럼 이어지고 있다.)처럼 아주 거대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불은 변신의 마법사이기도 하고, 고마운 존재였다가도 불현듯 무시무시한 존재로도 바뀔수 있는 변덕장이 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불을 사용해서 요리를 하기도 하고, 설탕과 베이킹파우더를 녹여서 달고나를 직접 해먹기도 했었다. 나의 부모님 시절에는 어릴 적에도 어머니들을 도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짓기도 했었었다. 요즈음 아이들은 불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생활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보다도, 공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에 대한 콘텐츠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활 속에서 우리 어른들이 어린 시절에 누리던 그 많은 자유를 요즈음 아이들은 박탈당하고 말았다. 길거리와 동네에는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고, 놀이터나 학교 등하교 시에도 부모님이나 어른이 동반해야 하며, 더 이상 이웃이나 동네 어른들 모두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보호해주던 커뮤니티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보통 내가 찍은 아이들의 사진들을 보며 지나가는 말로 남편이 "넌 왜 이렇게 애들 뒤에서 찍는 사진이 많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세상과 직접 대화할 때, 어른들의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다. 어떤 칭찬이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소견이나 그릇된 선입관을 심어주기보다, 아이들이 직접 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한 발짝 뒤에서 아이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아이의 어깨너머로 살짝 들여다 보기만 하자. 아이들을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자. 우리들의 아이들을 조금 더 신뢰해보자.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