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다. 이유가 있다.
"혈압 잴게요."
"네."
140이 찍혔다.
"긴장하셨나 봐요. 왼쪽 팔로 다시 잴게요. 가끔 이럴 때 있어요."
다시 쟀더니 180.
"아... 그냥 140으로 쓸게요."
태어나서 처음, 그것도 마흔이 넘어서 받은 건강검진이었다. 강남의 꽤 괜찮은 병원. TV에서 본 사람도 옆에 있었다. 괜히 신뢰도가 올라갔지만 내 몸은 전혀 다른 숫자들을 보여줬다.
의사는 말했다. "혈압이 이 정도면 약을 써야 해요. 복부 지방도 많고요. 식사 조절 좀 하시고, 2주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집 앞이 구청이라, 그 길로 2주 동안 매일 혈압을 쟀다. 여전히 140 이상.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전부 취소했고, 오히려 친구들이 더 걱정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2주 뒤, 병원. 혈압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 초음파에 뭔가 보인단다. CT를 찍자고 했다. 출국이 나흘 남았다고 하자, 결국 마지막 날 오전에 예약을 잡아줬다. "한국에 있었으면 약 썼을 텐데... 외국에 계시니 고민이네요."
CT 찍기 전 사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밤이면 괜히 간 쪽으로 손이 갔다. 간이라니. 조용한 장기라더니, 내가 그동안 혹사하긴 했구나.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아버지가 떠올랐다. 건강하시던 분이셨다. 마흔일곱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진단 후 1년이 채 안 돼서. 너무 갑작스러웠다. 이제 오 년만 있으면 아빠와 나는 같은 나이가 된다.
CT 결과는 이상 없었지만, 피검사 수치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복부 비만도 혈압도 그대로였다.
"선생님, 저 요리사인데요. 예전 직장에서 매일 고지방 아이스크림을 한 박스씩 먹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그게 원인입니다. 운동도 원래 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근육량은 평균 이상입니다. 운동하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
말이 많아졌다. 억울했다.
전 직장은 진짜 최악이었다. 계약서엔 오전 7시 출근, 오후 3시 퇴근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약서 얘기였다. 열두 시간씩 서 있었고, 점심시간도 없이 일했다. 무능한 상사는 덤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말 그대로 녹아내렸고, 유일하게 위안이 된 건 아이스크림이었다. 전에는 너무 달아서 한 입도 못 먹던 걸, 매일 반 박스씩 먹었다. 그래야 좀 숨이 쉬어졌다.
"아, 그리고 담낭에 용종이 있어요. 지금은 기준점에 살짝 걸쳐있는데, 내년이나 후년에 다시 검사받으세요. 수술할 수도 있겠네요. 심각한 건 아닙니다."
아니, 내일 출국인데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속으로 그랬다. 의사는 아무 말 없이 문 쪽을 바라봤다.
결국 불안함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왔다.
처음 한 건 아이스크림을 끊는 일이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것들은 전부 버렸다. 다음은 운동. 케틀벨, 메이스벨에 더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1.3km 되는 공원을 돌다 말다 했는데, 어느 날은 쉬지 않고 3km를 뛰었고, 지금은 걷고 뛰고 해서 5km를 채운다.
한 번은 뛰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진단을 받고 산을 매일 오르셨다. 한 번은 같이 가자 하셨는데, 나는 싫다고 했다. 어렸고, 게을렀다. 그때 같이 갔어야 했다.
혈압계도 샀다. 매일 아침 잰다. 체중은 줄었고, 혈압은 120/80으로 돌아왔다. 바지는 헐렁해졌고, 달리기는 점점 좋아졌다. 퍼스의 평지, 좋은 공기, 많고 널찍한 공원들, 강변. 뛰다 보면 도시가 탐험지처럼 느껴진다. 조만간 시내까지, 13km를 뛰어볼 생각이다.
담낭 용종은 여전히 있고, 숫자는 아직 경계선이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목표는 하나. 건강하게 쉰을 넘기는 것. 트라우마다. 너무 갑작스럽게,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만이 아는.
오늘 달리고 체중을 쟀더니 89kg가 찍힌다. 오랜만에 본다. 숫자 8. 잘하고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