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플라토노프 - 코틀로반
코즐로프는 살해된 채로 입을 꾹 다물고 계속 누워 있을 뿐이었다.
불만이 없어 보이는 사프로노프도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그의 붉은 수염은 힘없이 반쯤 벌어진 입을 덮고 있었고 입술 위까지 자라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생전에 키스 한 번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 주위에는 눈물이 말라 소금기로 변한 것이 보였다.
치클린은 소금기가 배어 있는 그 자국을 지우며 생각했다.
'사프로노프와 코즐로프는 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울었을까?'
시대 배경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이고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이 부농과 부르주아에 대해 갖는 적대심이 대단하다. 사유재산을 가지고 자유롭게 산 것도 죄인가 싶을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붙인다.
반농과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 스스로의 유토피아를 위해 코틀로반을 판다. 그들은 모두를 위해라는 이념을 내세워 부농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내쫓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러시아의 조지 오웰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졌다. 사회주의 소설이니 1984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시대배경이 그래서인지 두 작품이 언뜻 비슷한 느낌을 풍기기는 했지만 분위기 자체는 완전히 달랐다. 1984를 읽으면서 느꼈던 소름끼치는 충격과 날선 두려움이 코틀로반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디스토피아 문학 특유의 회색 연기같은 공허함이 진득하게 풍겼다.
소위 노동자 계급이라 불리는 이들은 잠을 자고, 먹고, 집을 짓기 위한 코틀로반을 파는 일을 반복하는데 계속해서 깊어만 가는 이 구덩이가 왜 내게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걸까.
어느새 희망을 상상하는 걸 포기해버린 이들은 그럼에도 어떤 희망을 위해 코틀로반을 파지만 따지고 보면 그 자체가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집을 짓는 초석을 열심히 쌓는데도 결국에는 그 아이가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린 것처럼.
희망이 사라져 버렸음에도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일까.
어쩌면 코틀로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 끝에는 절망밖에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파고 파고 또 파는.
우리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아직 살아 있는 거야? 아니면 이제 가버린 거야?"
소녀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응, 조금."
어머니가 대답했다.
"내 곁을 떠나거든 내가 여기 주검이 되어 있다고 말하지 마. 네가 나에게서 태어났다고 아무한테도 말해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너를 죽이려 들 거야. 여기서 멀리멀리 가서 모든 걸 잊어버려. 그래야 살 수 있다."
"엄마는 왜 죽는 거지? 브루주아이기 때문이야? 아니면 죽음 그 자체 때문이야?"
"이제 지겨워. 아주 지쳐버렸어."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가 아주 먼 옛날에 태어났기 때문일 거야. 나는 그렇지 않지만."
소녀가 말했다.
"엄마가 죽더라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엄마가 존재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냥 나 혼자 살며 엄마를 내 머릿속에서만 기억할게. 그런데 엄마."
소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나 한 방울만큼만 잘게. 아니 반 방울만큼만. 엄마는 죽지 않도록 생각을 좀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