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람 Jul 24. 2015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러나 만질 수 없는

조해진 - 아무도 보지 못한 숲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이 방의 단 하나뿐인 창문으로는 낮과 밤 정도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형광등을 끈 채 잠들었다가 저녁에 눈을 뜨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잠 속에서 휘발되어 버렸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건 윤을 매료시켰던 이 방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이 방에 너무 많은 시간이 밀려와 쌓이곤 한다는 것을 윤은 모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쓰다가 내다 버린 시간의 더미 같은 이 방을 그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럴 때면 아무리 수시로 시계를 확인해도 시침과 분침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어제와 오늘은 연결되어 날짜 구분도 모호해졌다.

지나간 시간은 시시때때로 현재를 침범했고, 기대치가 없는 미래 또한 자주 현재의 시간에 되비쳐졌다.

추억할 과거도, 꿈꿀 미래도 없었다.


12년 전, 가스 폭발 사고 이후 동생이 사라졌다.

언뜻 들어보면 마치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의 한 문장 같기도 하다. 이제 곧, 사라진 동생을 찾아 온 거리를 헤매야 할 것만 같고 그러다가 마주친 잔혹한 진실에 절망하면서도 꿋꿋이 앞을 향해 걸어가는 주인공이 나올 것만 같은……. 어쩌면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풀어낼 수 있는 이 사건을, 작가는 미수와 현수와 윤, 세 사람의 시점에서 적절히 혼합하며 잔잔하게 혹은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 울분을 토해내듯 진행해 나간다.


애초에, 미수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동생, 현수를 초반에 등장시킨 것부터가 그런 긴장감은 배제시켰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동생이 죽었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미수, 아무도 모르게 미수를 도와주는 현수, 자신의 문제 때문에 미수와의 관계에서 갈팡질팡하는 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떤 긴장감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환상 소설 같은 느낌을 풍긴다. 판타지는 아닌데 미수와 현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저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은 다른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것을 바라보는데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시점 전환 덕분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다른 곳에 존재하는데 마치 서로가 마주 보고 있는 듯 그렇게.


미수와 현수는 둘 다 어딘가에 있는 감정 선이 고장 나 버린 사람 같다. 물 흐르듯 유영하는 삶을 이어가며 마치 그게 벌이라도 되는 듯 감정을 최소화 시킨다.

어쩌면 그래서, 미수가 참지 못한 감정을 불현듯 터뜨려 버렸을 때, 현수가 마지막을 직감하고 그저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렸을 때, 마음 한 구석이 아프게 울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실인 줄 알았던 그것이 사실은 기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떨까.

분노, 증오, 안도, 초조, 슬픔. 총체적인 감정들이, 그동안 억눌려 왔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정신없이 미수를 휘몰아친다. 미수는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마비 되어 여기저기 헤맨다. 나는 두 사람이 부디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가장 의외였던 점은 미수와 윤의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것들은 때로 우리를 비웃으며 재빠르게 빠져 나가 버리고는 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겠지만 나쁜 결말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최선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결국 사건은 마무리 되고 남은 이들은 인생을 지속해 나간다.

그게 설령 아무 준비도 없이 세상 속에 던져진 버그라 할지라도.


책을 덮고 난 다음에 잠깐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떤 숲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 숲은 눈치 채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 존재할 거라는 막연한 확신 아래 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 숲에서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존재를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방바닥에 귀를 대 보았다.
바닥 아래 깊은 곳에 호젓한 호숫가가 보이는 듯했다.
M이 자주 발을 담그고 놀았을 고요한 호수는 소년의 얼굴을 맑게 되비췄다.
소년은 이 시간을 잊을 수 없다는 걸 느리게 깨달았다.
이제 앞으로 어딜 가고 누구를 만나든, 또 어떤 지긋지긋한 시간 속에 놓이게 되든 이렇게 이 방에 귀를 대고 웅크리고 있던 순간은 소년이 떠올리는 M의 모습 그 자체일 것이고 그 때마다 소년은 아주 조금씩 웃게 되리라.


작가의 이전글 죽음 이후에 남겨지는 것들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