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에 완주
쌍안 망원경 100sa를 마련하고 2년 여에 걸쳐 메시에 목록 110개를 모두 찾아보았다. 계절별로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제 때 찾아보지 못하면 해를 넘겨야 하기에 한 해 동안 다 찾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장마, 추위, 구름 등 관측 여건이 안 되어 관측을 못 나가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날만 좋으면 장비들을 싣고 미친 듯 집을 뛰쳐나갔다. 관측지로 가는 중에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하나둘씩 떠오르는 별들이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밤하늘에서 메시에 목록을 찾아가는 중에 만난 천체들은 이제껏 내가 살아오면서 '본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별을 '본다'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을 보는 일이며 시간으로 측정된 공간을 응시하는 일이다. 망원경이 보여준 심우주는 내겐 초현실 그 자체였다. 한 점으로 빛나는 별이 아닌 성운이나 성단, 은하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놀라운 시각적 경험은 내 뇌 속의 회로를 재배선 하는듯했다. 아이피스를 들여다보면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며 보이는 세상은 실재(實在)가 아니라고 말했던 이탈리아 과학자 카를로 로벨리를 떠올리기도 했고 때론 유년 시절 흔들어보았던 만화경의 거울에 가득했던 반짝이의 기억이 소환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엄청난 인지적 경험을 가져다준 별 보기 덕에 이제야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동서남북을 분간하고 별자리로 계절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별하고 황도대를 따라 움직이는 목성이나 토성, 화성 같은 행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메시에가 누구인지, 목록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각 대상들의 특징을 메모하며 휴대폰으로 전자 성도를 익히고 있노라면 마치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가 되어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었고 하늘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별자리도 잘 모르던 초보에게 메시에는 안시 관측의 첫걸음이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어두운 밤하늘로 나가 평생 듣도 보도 못했던 메시에 목록이란 걸 찾기 시작했다. 장비도, 하늘도, 호핑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메시에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한밤중 공동묘지 꼭대기에서 첫 호핑으로 m57을 찾느라 헤맸던 기억이 선연하다.
겨울이 되자 아이피스에 한가득 꽉 차는 오리온 대성운을 두 눈에 담은 후 뭐에 홀린 듯 밤하늘로 나갔고 여러 성단, 성운 등을 찾아가며 빛나는 별들의 찬란함에 아찔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어 봄철의 사자자리부터 시작된 은하 찾기는 처녀자리 은하단을 거치면서 거창한 프로젝트나 하는 것 마냥 힘이 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 또한 내 생에 다시없을 특별한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았다. 힘겹게 은하단 탐험을 끝내고 이어진 초여름 밤하늘은 은하수와 쏟아지는 별들로 그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단언컨대 북반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자리는 전갈자리다. 붉게 빛나는 안타레스에서 고고하게 내려오다 커브를 틀어 치켜 올라간 전갈 꼬리의 각도는 언제 봐도 매혹적이다. 전갈자리로부터 은하수 한가운데 위치한 궁수자리에 있는 수많은 별무리와 별구름, 성운들은 내 넋을 완전히 홀려버렸고 넉 달의 월령 동안 은하수에 흠뻑 취해 지낼 수 있었다. 처녀자리부터 궁수자리를 탐색하는 동안 많은 메시에 목록을 만날 수 있었는데 110개의 목록 중 두 개를 남겨두고 장마 같은 날씨를 만났다. 메시에가 시험도, 시합도 아닌데 빨리 끝내고 싶은 조바심이 차올랐다. 밀린 숙제가 남은 기분이었다. 날마다 기상 상황을 체크하는 한편 머릿속으로는 메시에가 뭐라고 이 나이에 이러고 있는지... 자조 섞인 한숨이 더해지는 뒤숭숭한 나날이 이어졌다.
장마철이 이어지자 메시에를 끝낸 다음엔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안시 관측자의 당면 과제이지만 이 질문에 앞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이는 내가 안시 관측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별을 보는 내내 두 질문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이제야 질문의 순서가 바뀐 것을 알았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무엇을 보고 싶은 지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이리저리 따라가다 보면 그 길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자 어떤 것을 보더라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다 보면 샛길도 들어서고 뒤로 돌아갈 때도 있겠으며 때론 제자리를 돌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목적은 있되 목표는 없는 별 보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메시에 대상을 보고자 월령도 안 좋고 날씨도 별로였던 7월 초, 광덕산에 올랐는데 의외로 하늘이 괜찮아 생각보다 진한 여름 은하수를 만났다. 백조자리 근처를 훑은 후 천문대 지붕에 걸쳐있는 카시오페이아 주위를 둘러보는 중 산 아래에서 구름이 몰려왔고 구름과 함께 달도 올라왔다. 찾고자 했던 은하는 볼 수 없었으나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은은한 달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달구경을 했고 이날 목성과 토성은 구름을 피한 자리에서 더없이 선명한 상을 보여주었다. 뚜렷한 목성의 줄무늬와 예리한 고리를 두른 토성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가자 옆에 있던 두 어대의 차들이 모두 내려가고 아무도 없는 천문대 주차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구름과 별과 달은 연신 숨바꼭질을 했다. 객석의 불이 꺼져야 시작되는 연극처럼 태양빛이 사라져야 온 우주가 무대에 오르는 것이고 나는 그걸 보기 위해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이건 밤에 하는 광합성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했다. 그 사이 달은 구름 속을 노닐다가 잠깐씩 얼굴을 보여주곤 했다. 7월 장마 기간 동안 두 번의 관측에서 잠깐씩 열린 하늘을 통해 비둘기자리 은하 m74를 찾았고 8월 월령에 홍천에서 마지막 남은 메시에인 고래자리 m77을 찾을 수 있었다. 고도가 낮아 끝까지 힘들었던 은하 m77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구경 100mm 쌍안경인 100sa는 기계치, 장비치인 내게 더없이 좋은 장비다. 무게도 가벼웠고 설치는 더없이 간편하며 광축이니 뭐니 신경 쓸 게 없다(신경 써야 하는데 몰라서 못 썼는지도 모른다). 메시에 완주를 하는 동안 함께 한 장비라 정도 많이 들었다. 이후의 관측에 함께 할 장비로는 돕소니언 망원경을 택했다. 돕소니언은 뉴턴식 반사 망원경으로 안시 관측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망원경이다. 100mm 쌍안경에서 14인치 돕소니언 망원경으로 기변하면 광량이 엄청나게 늘어 그동안 흔적만 확인했던 메시에 목록들을 보다 선명히 디테일하게 관측할 수 있다. 시공간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호기심으로 몇 년 전 늦은 나이에 시작한 물리학, 수학 공부가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지만 이 험한(?) 취미에 들어온 걸 후회한 적은 없다. 무거운 장비를 챙겨 먼 관측지로 달려가 장비를 세팅하기까지의 정신없고 다이내믹한 시간이 지나면 밤하늘과 아이피스만 바라보는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이 찾아든다. 이 잠깐이지만 영원 같은 숨죽인 적요함이 더없이 좋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겨운 취미지만 힘닿는 데까지 즐기다가 인생의 끝자락에선 반짝거리는 별들의 기억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