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돕소니언
안시 초보의 별 보기는 메시에 목록을 완주하면서 시즌 2로 넘어갔다. 배율변환식 100mm 쌍안경으로 볼 수 있는 한계는 뚜렷했다. 은하 같은 딥스카이 대상들이 흐릿한 솜뭉치로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엔 별이 아닌 천체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 미친 듯 열심히 메시에 목록을 찾았다. 그리고 메시에를 끝낼 즈음에 더 큰 망원경으로 내가 봤던 대상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볼 수 있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져 14인치 돕소니언 망원경을 품에 안았다. 돕소니언은 존 돕슨 씨가 설계한 뉴턴식 반사망원경으로 가성비가 갑인 망원경이다. 망원경의 구경을 키울 때 경통이나 가대 제작이 비교적 용이하며 제작 비용이 동일할 경우 굴절 망원경보다 돕소니언 망원경의 구경이 훨씬 커질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안시관측에 최적화된 망원경이다.
두께가 4cm 정도 되는 14인치 거울이 망원경의 주경이다 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제일 하단의 로커박스에 미러박스를 얹고 거기에 폴대를 끼운 뒤 폴대 끝에 세컨더리 케이지를 얹는 모양새의 돕소니언 망원경. 조립 설치를 끝내면 내 키만 한 망원경이 된다. 자작나무를 사용한 하우징의 클래식 돕소니언 망원경. 기성 돕소니언에 비해 가격은 좀 더 나가지만 그만큼 가볍다. 일반 기성품 망원경은 무거워서 내 힘으로는 10인치도 들 수 없지만 이 14인치 망원경은 내가 들 수 있는 수준이라 운용이 가능하기에 다른 선택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전 100mm 쌍안경으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밤하늘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은 14인치 수제 돕소니언!
새로 장만한 망원경, 돕은 내가 들 수 있는 무게 한계치의 망원경이고 두 번째 망원경이자 내 마지막 망원경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큰 망원경은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렇게 굳은 결기로 무리를 해 마련한 망원경의 로커 박스에는 망원경의 스펙이 각인되어 있다. Orion UK 14" f4.5 1/10. 영국 오리온사의 14인치 미러, 초점비 4.5 그리고 로커 박스의 다른 면에는 새기고 싶었던 글귀를 각인했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아는 만큼 보인다는 뜻의 라틴어. 정말이지 밤하늘은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면 안 보인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일에 힘을 쓰겠다고 마음속에도 깊게 각인했다. 이전의 쌍안 망원경을 팔아 새 망원경을 구입하는데 보탰다. 쌍안 망원경에 정도 많이 들었는데 보내는 게 아쉬웠다. 새로운 돕은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내 이름의 이니셜도 함께 각인했다. 힘이 있을 때까지 함께 별을 볼 새 망원경에 나는 '토끼굴'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로 들어가 신기한 세계를 만나는 것처럼 나는 이 Rabbit Hole을 통해 신기하고 경이로운 우주를 만날 것이다.
돕을 마련 하면서 여기에 맞는 아이피스와 필터등을 마련했다. 쌍안망원경도 꽤 부피가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돕소니언으로 바꾸니 짐이 정말 많아졌고 덩달아 살 것들도 많아졌다. 어쩌자고 나는 망원경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져서 내 수준에 가당치도 않은 금액을 털어 이것저것 망원경 액세서리들을 사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이피스, 필터 등등 하다못해 관측지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고민도 없이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장비의 성능을 향상하거나 아니면 추운 관측지에서 몸을 덥힐 것들이었다. 지름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강림해서 아이피스도 점점 좋은 것들을 눈여겨보다 눈 꾹 감고 지르는 일이 빈번했다. 한 개도 없던 보온병이 다섯 개로 늘어났고 발열바지, 발열 조끼, 방한화, 털모자에 휴대폰으로 보던 전자 성도를 좀 더 크게 보기 위해 저렴한 패드를 장만했고 아이피스에 이슬이 맺히지 말라고 두르는 열선과 열선에 전기를 공급할 배터리 몇 개까지 짐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미니멀리스트로 살던 내게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가 도착했고 좁은 집엔 관측 장비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소리 없이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