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피스풀 J와 집의 시간
엄마한테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 자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은 느낌. 한여름의 해바라기 같은 분위기 말이다.
가쿠타 미츠요의 단편 소설 <신의 정원>에는 엄마의 시한부 선고라는 절망스러운 순간을 가족에게 공유하기 위해 주인공의 아빠를 중심으로 삼촌과 이모, 고모와 조카까지 모두 모여 식탁 앞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논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치 축하하는 자리처럼, 굳이(!) 식사 모임을 준비하는 방식에 반발하며 주인공은 엄마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납니다. 시작은 여행이었다가 난민 캠프의 셰프가 되어 세계 곳곳을 떠도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이별을 앞둔 연인과 마지막 만찬을 먹다가 갑자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죠.
가족과 친척이 함께 모이던 식탁의 기억이, 도망친 줄 알았던 자신 안에 이미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자신이 결국 그 음식들과, 그 식탁과, 가족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늦게서야 인정하게 됩니다.
" 고등학생 때 여름방학 첫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클럽에 모인 친척들, 아버지가 만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제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가족의 일원이다. 엄마가 만드는 일상적인 음식과 아버지가 만드는 화려한 요리 그리고 친척들이 함께 둘러쌌던 식탁은 어쩔 수 없이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런 것들로 내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가쿠타 마츠요 <신의 정원>
엄마의 집밥이나 식탁을 둘러싼 기억들은 특히 에너지가 고갈되고 지친 날 갑자기 뿌연 안갯속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등대처럼 현실에 등장합니다. 마치 냉동고 속 호두과자처럼 힘들 때 하나 꺼내서 입에 물으면 기운이 반짝 나는 달콤한 에너지를 주고 사라지죠. 내 안에 행복하고 눈부신 식탁의 기억이 많으면 꺼내먹을 달콤함이 많아 회복 탄력성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식탁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바라기 같은 엄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광채를 잃어버린 날도 분명히 있습니다. 친구와의 수다로도 해결되지 않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침잠하게 되는 날, 그럴 때 저는 타인의 따뜻한 일상을 빌려 조용히 하루를 버텨봅니다.
그건 바로 책장 구석에 꽂힌 <신의 정원> 같은 광채 어린 식탁의 시간과 음식에 관한 책을 야금야금 꺼내 읽는 거예요. 잠시 책에 정신을 팔고, 책 속의 세계에 나를 기대다 보면 에너지가 바닥인 날도 조용히, 무사히 넘어갑니다.
" 창문으로 환하게 햇살이 비쳐드는 그 클럽에서 아버지가 빵을 자르고 차콜리를 따르고 모두가 건배하고 방 안이 광채와도 같은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는 꿈을 꾼 것은, 아마도 부엌에서 풍겨오는 콩 수프와 음식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쿠타 마츠요 <신의 정원>
오늘은 맛있는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습니다.
가쿠타 마츠요의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와 에쿠니 가오리의 <부드러운 양상추>.
지치고 에너지가 바닥나는 날에는 타인의 눈부신 식탁의 시간을 버터 향 나는 페이스트리처럼 조금씩 베어 물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 당장 씩씩하게 요리를 할 기운은 없지만, 입맛을 조용히 깨워줄 식재료가 있는지,
소설가들의 식탁과 부엌을 따라가며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래도 괜찮겠죠?
내일의 해바라기는
내일의 제가 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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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피스풀 J는
살림과 육아, 일을 저글링 하며 하루를 굴려가는 82년생입니다. 감성을 논리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미적 직관이란 평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나의 삶의 장면을 언어로 설계하는 일을 즐거워합니다. 인테리어 매거진의 에디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지금은 새로운 영역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