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앙 Jan 13. 2024

카페. 두드리다

단편선

2월. 12일.

합정 어느 카페. 낮.     


남자는 노트북을 켜고 익숙한 마우스 움직임으로 어도비 프리미어와 포토샵을 띄운다. 

작업 중인 프로젝트를 불러오고 타임라인 어느 지점에 커서를 옮긴다. 

그리고 정적. 컴퓨터 화면은 한참 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다.


카메라 빠지면 

콘센트가 있는 넓은 단체테이블에 자기 작업실처럼 자신의 컴퓨터를 세팅해 놓은 남자가 보인다. 

  

세단처럼 잘 빠진 노트북을 켜고 편집 툴이라던지 포토샵 같은 전문가용 프로그램을 켜고, 제법 그럴싸한 그림을 띄운 다음 가끔 스페이스바만 톡톡 두드려도 사람들은 나를 뭔 잘 나가는 프리랜서로 보겠지만 나는 망할... 백수다.      


남자 옆에 어떤 아가씨가 앉자, 남자는 커서를 옮겨 마치 작업 중인 양 다른 이미지를 로딩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남자의 손.     


영화를 찍겠다고 깝죽거리며 매일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긴 하지만

실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는 것이다.


여자의 컴퓨터 화면을 흘깃 훔쳐보는 남자. 여자 역시 포토샵을 켠다. 

그녀는 '진짜 일을' 하는 중이다. 일 전화까지 받으며 미친 듯이 열일하는 여자. 

남자는 노트북을 닫고 짐을 싼다.

     

루저의 삶. 병신. 아니 병신이라는 말도 아깝다. 다른 병신들에게 모욕이라...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어떠한 특별한 의미도 없음을 잘 알고 있다.



          

2월. 13일.

합정 어느 카페. 낮. 

  


어제와 마찬가지로 윈도우가 켜지고 프로그램들이 실행된다. 남자의 차림새도 그대로다. 

다만 배경의 테이블 사람들만 바뀌어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멍 때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생긴 취미는... 뭐랄까 상상놀이이라는 것인데, 

내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직업 등을 상상하는 것이다.

     

남자가 바테이블 제일 왼쪽의 남자를 본다. 중년의 그는 전형적인 직장인지만 어딘가 시름이 깊어 보인다. 

낡은 정장. 낡은 시계와 낡은 구두. 깊은 주름.     


저 아저씨는 고마움이란 1도 모르는 자식새끼와 집에 와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막장드라마를 보는 아내를 위해 아침부터 밤 끝까지 상사에게 아부를 하고 아랫사람에게 잔소리를 퍼 부우며, 샷건을 자신의 입 속으로 넣을 용기가 생길 때까지 버티는 이 시대의 가장이다.


남자의 시선이 직장인에서 옆 커플로 옮겨진다. 

커플 몽타주. 서로 껴안고 가볍게 뽀뽀하는 커플 등등.     


간단하다. 죽창이 필요하다. 아주 날카로운 죽창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남자의 시선은 오른쪽 구석에서 책을 쌓아두고 공부하는 여학생으로 옮겨간다. 

[수학의 정석] 등등 학습지들이 쌓여있다. 이어폰을 낀 여학생 몽타주.     


나도 한 때 대학이 목적일 때가 있었다. 그놈의 대학. 대학교에 가면 살이 빠진다니 애인이 생긴 다니 하는 어른들의 거짓말을 믿으며. 차라리 산타할배가 진짜라고 하지. 요즘 애들은 다르다고 해도 꾀나 순수한 것 같다 휴. 힘내라. 열심히 해라. 네 삶은 다르길 바란다. 대학이 꿈이 아니라 꿈을 위한 수단이 되길 바란다. 나처럼 알콜 쓰레기는 되지 않길 바란다. 술은 달고 쓰고 어쨌든 좋다. 문드러진 마음 한 켠 적실 수만 있다면 양잿물이라도 시원하지 않겠냐.

            

시선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맞은편 여자로 옮겨진다. 

긴 생머리에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테이블에 각종 연필과 그림도구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린다. 

여자의 몽타주들. 그림. 옆모습. 오른손. 화장하는 모습 등등.     


그리고 저 여자...

나와 마찬가지로 항상 이 시간 이 카페에 앉아 뭔가를 그리는 저 여자. 신경 쓰인다. 

아마 화가나 웹툰 지망생 같기도 하고, 나처럼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때우는 것 같기도 하고. 

학생인가? 나보다 어린것 같기고 하고, 동갑인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가끔 고개를 돌릴 때 보이는 옆모습의 실루엣이 내 스타일이다. 

뭘 그리는 거지? 애인은 있을까? 가끔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받는데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하트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도 자주 하트를 그려 넣으니 뭐. 가족일 수도 있고. 

하지만 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 오른손 약지에 있는 반지. 보통 커플링은 왼손 약지에 끼우는데. 왼손잡이도 아니고. 헷갈리게. 뭘까. 무슨 의미일까. 누가 준 것일까. 그녀는 자주 화장을 고친다. 그다지 고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밤에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인가. 말을 걸고 싶어도 딱히 접점이 없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뭐라고 하지.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 인사라도 하고 지네요? 아니다. 저 사람은 내 존재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내가 훔쳐본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사실이지만. 몰래 메모를 남길까? 그랬다가 까이면? 


그러면 나를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VIP처럼 대접해 주는 친절한 카페의 직원들과.    


인서트_카페 직원들 웃는 모습.


맛있는 커피와.  


인서트_크레마가 잔뜩 올려진 아메리카노.  


무엇보다 집에서 십리 반경 유일한 이 카페를 잃는 수가 있다.     


인서트_남자의 집과 카페의 거리가 표시된 지도.


망할 건덕지가 없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그래도 용기 내서 아무 말이나 해보자. 

500미터만 더 가면 다른 카페가 있다.

     

그때 여자 옆으로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앉는다.     


계획에 없던 놈이다.! 여자도 남자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 같다. 

지금 다가간다면 저 남자와 비교될 것이 뻔하며 나는 승산이 없다.

     

포커스가 여자에서 창 밖 편의점으로 옮겨진다. 각종 발렌타인 데이 용품들이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달력을 확인하는 남자. 2월 13일이다.     


내일이다. 내일이 결전의 날이다.    

 

노트북을 닫는 남자. 카페에서 나간다.          






2월. 12일.

합정 어느 카페. 낮.       


여자가 바 테이블 위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림용품들을 나열한다. 나만의 공식이 있는 양, 커피는 왼쪽에. 가운데엔 하얀 종이들. 오른쪽엔 연필, 펜, 2B펜, 지우개 순 등등 반듯하게 정열 한다.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여자는 쉽사리 뭔가를 쓰지도 그려내지도 못한다.     


나는 직원처럼 이 카페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카페가 괜찮은 것도 사실이고, 집 근처 10리 안에 이 카페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진짜 이유는 내가 이 카페를 매일 올 만큼 시간이 넘쳐흐르는 망할 백수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바 테이블 옆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 다들 제작기 뭔가에 집중하거나, 생산적인 일에 몰두해 있다.     


웹툰 작가로 언젠간 성공을 거둘 거라 집에 큰소리를 떵떵 치며 알바조차 안 하고 있지만, 사실 머릿속에 별 생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단지, 내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기에 저렇게 일에 집중할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며, 도대체 카페에 앉아서 돈 버는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다들 금수저들인 걸까. 아니면 내가 그저 변경하기 급급한 비열한 루저이기 때물일까.

     

여자가 드디어 펜을 쥐고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동그라미다.     


예술은 개뿔, 카페에 죽치고 앉은 지 30분 만에 드디어 그렸다는 것이 동그라미다. 내가 참 자랑스럽다. 

미대 4년 나와서 그린다는 게 그냥 동그라미라니. 세모도 그리지 그랬어.?      


옆 사람이 흘깃 자신의 그림을 바라본 것을 눈치챈 여자. 

서둘러 세모를 그린다. 뭔가 예술을 하는 듯.     


이 추운 날 패션이고 지랄이고 뜨신 솜바지나 주워 입고 나올 것이지, 

꼴에 여자라고 2시간 동안 화장하고 옷 고르고 와서 그린다는 게 동그라미랑 세모라니. 이 모질이 관종아...

    

머리를 쥐어짜는 여자. 유리창에 비쳐 남자가 카페에서 나가는 것이 보인다. 슬쩍 남자를 쳐다보는 여자.            



2월. 13일.

합정 어느 카페. 낮.   


마찬가지로 테이블 위에 그림도구들을 나열하는 여자. 

다만 배경의 테이블 사람들만 바뀌어있다.     


그렇다고 매일 동그라미나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고, 대체로 나는 옆에 앉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스케치한다.  


여자가 바테이블 제일 왼쪽의 남자를 본다. 중년의 그는 전형적인 직장인이다. 뭔가 시름이 깊어 보인다. 직장인을 그려내려 가는 여자의 스케치.      


저 아저씨를 보니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정년이 넘도록 아직도 직장을 다니시는데, 못난 딸 먹여 살린다고 새벽도 없이 출근하시고 밤늦게 퇴근하시다  보니, 어릴 때 보다 얼굴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애교 없는 딸은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했는데... 용기 내서 해봐야겠다.      


여자가 폰을 꺼내서 아빠에게 ‘사랑해요 아빠 힘내세요!’를 썼다 지웠다 하다가 하트만 여러 개 보내버린다. 

여자의 시선은 직장인에서 옆 커플로 옮겨진다. 서로 껴안고 가볍게 뽀뽀하는 커플. 커플을 그리려던 여자의 연필심이 뚝 부러진다.     


간단하다. 죽창이 필요하다. 아주 날카로운 죽창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여자는 시선을 돌려 오른쪽 구석에서 책을 쌓아두고 공부하는 여학생을 본다. 

[수학의 정석] 등등 학습지들이 쌓여있다. 여학생을 그려내려 가는 여자.     


생님 졸 때 머리카락 하나 뽑는 게 뭐라 그리 웃겼던지. 민들레 씨만 날아가도 키득키득거렸다. 

이제는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세상은 나를 이천 년 초반 어디쯤 뛀궈 놓고, 혼자 세차게 달려간다. 

나는 그저 지난 것들만 살필 뿐이다. 

오늘 밤은 그림이고 나발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밤늦도록 대화하고 같이 늦잠을 자고 싶다. 

얘 너는 계속 순수했으면 한다.     


여자는 펜을 놓고 정면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비친 남자가 흐릿한 형상으로 앉아있다.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옷차림. 같은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하는 남자.


남자의 몽타주들_ 작업물. 노트북 두르리는 손 등     


그리고 저 남자... 

나와 마찬가지로 항상 이 시간 이 카페에 앉아 뭔가를 그리는 저 남자. 신경 쓰인다. 

흘깃 보니 컴퓨터로 뭔가를 작업하는 것 같은데, 전문가용 프로그램 하나 띄어놓고 스페이스바만 딱딱 누르는 것이 왠지 섹시하다. 나와 달리 뭔가에 집중하는 저 모습도. 학생은 아닌 것 같고... 동갑인 것 같기도 하고. 

귀엽게 생겼는데. 항상 넓은 뒷자리 회의테이블에 앉아 뭘 하는 걸까. 

제대로 얼굴을 보고 싶은데, 지금 와서 항상 앉던 자리 말고 저 남자 정면에 앉으면 너무 그러려나? 

맨날 보는 거 너도나도 아는데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지.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 인사라도 하고 지내자고 하면 얼마나 좋냐. 

혹시 이 반지 때문인가. 검지에 맞춘 친구들과의 우정반지는 살이 쪄버려 약지에 밖에 맞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손가락 밖에 없는데 손가락에도 살이 찌다니. 비통하고 억울하다. 그래도 오른손에 꼈으니 커플링이라 오해하진 않겠지?  

저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거울이다. 화장을 고치는 척하며 저 엿볼 수밖에. 몰래 메모라도 남겨볼까? 그러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그러면 나를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VIP처럼 대접해 주는 친절한 카페의 직원들과.     


인서트_카페 직원들 웃는 모습.    


맛있는 커피와.     


인서트_크레마가 잔뜩 올려진 아메리카노.  


무엇보다 집에서 십리 반경 유일한 이 카페를 잃는 수가 있다.     


인서트_여자의 집과 카페의 거리가 표시된 지도.      


망할 건덕지가 없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그래. 여자라고 기다리던 시대는 지났다. 

용기 내서 아무 말이나 해보자. 500미터만 더 가  면 다른 카페가 있다.    

 

그때 여자 옆으로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앉는다.     


뭐야 이 기생오라비는... 아... 남자가 나갔다.     


포커스가 유리창에 비친 남자에서 창 밖 편의점으로 옮겨진다. 각종 발렌타인 데이 용품들이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달력을 확인하는 여자. 2월 13일이다.     


내일이다. 내일 말하자.          





2월. 14일.

합정 어느 카페. 낮. 



"저기...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만날천날 먹는 커피.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요."



이전 05화 트럭, 감금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