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선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한 해다. 만화가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는 빗방울에 신발과 양말은 축축해지고, 왼손에는 가방을 오른손은 우산을 들어 담배를 피울 손이 부족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느 건물 입구에서 잠시 우산을 버린 채 담배를 펴야 하는데 여간 타인의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 밖을 나오는 행인들은 인상을 쓰고 가끔은 경비원에게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끊을 수 없지.'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애용하는 골목 구석 유명하지 않은 낡은 만화방이 비 오는 날에만 유난히 사람들로 가득 차 그의 조용한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만화방에서 라면을 팔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들에게는 단지 비 오는 날의 휴식처겠지만, 만화가인 그에게는 그곳은 직장이자 꿈이며 목표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비에 대한 신경이 곤두서자 어느 순간부터 그는 비가 오기 전날부터 오감으로 날씨를 알아맞히게 되었다.
그날 아침도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곱실거리는 것이 블라인드를 걷자 역시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짧은 욕지기를 하며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잠시 창 밖의 동태를 살폈다. 그날따라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파는 육천 원짜리 싸구려 검은 우산을 들어 풍경의 색이 사라진 것이 마치 그가 연재 중인, 하지만 인기가 없자 계약 종료 통보를 받고 다음화를 마지막으로 결말을 지어야 하는 만화책 속 한 페이지 같았다. 급하게 결말을 만들어내야 하지만 그는 그런 아이디어가 없었다. 아니, 반대로 만화 후반부에 나올 예정이었던 기가 막히고 세계의 독자들이 환호할 엄청난 내용들이 머릿속에 얽히고 섞여서 도저히 그 매듭을 지을 수가 없었다. 밖의 비는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만화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태어나서부터 불행이라 이름 지을 수 있는 모든 불행과 고난을 견뎌온 여자가 어느 날 신을 만나 한 가지 소원으로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 만화는 신을 만나자마자 끝나게 생겼다. 오늘 안에는 결말을 지어 원고를 보내야 한다.
‘애초에 글러먹었군. 그럴 바에야.‘
만화가는 낙서로 가득한 종이를 구겨서 땅바닥에 던져버리곤 새로운 종이 위에 펜을 올렸다.
만화 속 주인공이 신에게 말한다.
’ 제 소원은 이 땅에 영원히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는 내친김에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다.
장마 1년. 부자들은 이 땅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다.
행복했던 사람들은 우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마 2년. 정치인들은 나라를 놓았고 종교쟁이들은 ’제2의 노아의 방주‘를 준비한다며 큰돈을 모금해 항공모함급에 생명체의 씨앗들을 옮겨 담기 시작한다.
장마 3년. 지하철은 물이 차 운행이 멈춰버렸고, 땅 위의 쇠와 철로 만든 자동차와 건물들은 녹이 슬어버렸다. 그 위는 썩은 시체들이 나뒹굴었지만 시체를 치울 사람들이 자살하자 결국 시체는 방치되었다.
결국 그 땅은 버려졌다. 오직, 원래부터 밖의 날씨엔 무관심한 지하에 살던 걸인들만이 살아남았다. 불행이 늘 곁에 있어서였는지, 모두가 다 함께 불행해져서인지는 걸인들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주인공은 어떻게 됐냐고? 그녀는 지하도의 왕이 되었다.
’ 이것도 나쁘지 않네.‘
마지막 페이지는 작대기를 대충 슥슥 그어 비가 세상을 잡아 삼키는 컷처럼 표현한 뒤 만화가는 펜을 놓았다. 그리곤 밖으로 나갔다.
우산도 없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한 모금 마신 뒤 고르지 못한 아스팔트에 고인 물 웅덩이에 풍덩하고 나자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