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선
영화 속 주인공들에겐 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공들은 불현듯 사건을 마주하고 개연성 있는 선택을 하며 결말엔 극복해 내거나 좌절한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바보이든 천재이든, 재벌이든 거지이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남자는 카페에서 숙제처럼 영화를 한 편 본 뒤, 컴퓨터를 닫는다. 나른해질 오후 3시다. ‘이제 뭘 하지.?’ 답은 정해져 있다. 늘 걷던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홍대거리를 걷는 것이다. 유명 체인점들이 늘어져있는 먹자 거리를 지나 영화관과 클럽거리를 지나 버스킹 하는 사람들과 구경꾼의 인파를 뚫고 연남동까지 1시간에서 길어야 2시간이 되는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는 것이 그의 일상화된 루틴이 되었다. 오늘은 내게도 특별하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싸움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남자는 생각하며 카페를 나섰다.
역시나 홍대거리는 인파들로 북적거렸고, 역시나 남자는 특별한 일 없이 마지막 코스인 연트럴파크로 진입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남자는 별 소득 없이 귀가에 냉장고에 차게 식은 먹다 남은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샤워를 한 뒤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끝내며 오늘도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짧은 자괴감과 늙고 쳐지는 과정인 자신의 얼굴에 소소한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그리고 수면제에 의해 잠에 들겠지. 연트럴파크를 하염없이 걸으며 남자는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에겐 목적이 있다. 나의 목적은 뭔가. 10년이 넘도록 생각했지만 생각만 한 남자는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오늘은 뭔가 다른 패턴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남자는 방향을 틀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본 소품샵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대부분 소품샵이 그렇듯 레트로풍으로 꾸며진 가게는 쓸모없는 예쁜 소품들이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 남자는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하며 새롭고 특별하고 생산적인 뭔가를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소품샵을 한 바퀴 빙 둘렀다. 편지지부터 인센스, 장신구부터 필기류까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 귀엽게 생긴 검은 손잡이 숟가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만원. 나쁘지 않았다. 한 달 전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술을 진탕 마시고 술자리를 정리하며 일회용 숟가락들과 함께 집수저마저 쓰레기통에 넣어버려 남자는 젓가락만 사용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젓가락의 손잡이는 베이지색이다. 검은색과 베이지색은 나름 잘 어울리지만, 영화학도로서 미학에 자부심이 있는 그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은 같은 색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누가 집이라도 찾아오면 부끄러워 당당히 상을 차릴 수 있겠는가.! 그는 소품샵을 한 바퀴 더 돌아보았지만 베이지색 숟가락은 없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품샵을 나와 다른 소품샵으로 달려갔다. 거긴 나름 규모가 있어 분명 베이지색 숟가락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소품샵 사장은 주일에도 일을 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다른 소품샵으로 가봤지만 역시 그가 원한 무광의 베이지색 손잡이를 가진 숟가락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사람들은 다가올 월요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갔는지 거리는 제법 한산해졌다. 아쉽지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남자는 방에 누워 내일은 꼭 자신의 젓가락에 어울리는 숟가락을 찾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은 자괴감을 느끼거나 수치심도 잠시 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마 새로운 내일의 미션이 생겼기 때문이라. 숟가락을 사고 나면 또다시 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은 모른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