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앙 Jan 29. 2024

잡지. 계속되다

단편선

정신과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점차 초조해졌다. 예약은 별 의미가 없다. 15분 간격으로 예약을 받지만 내담자의 한탄을 단칼에 끊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는 없다. 벌써 1시간 30분째 차분한 음악이 흐르는 대기실에 앉아있자 없던 정신병마저 걸릴 것 같았다. 코로나 이후로는 정신과는 북적 사람이 많아졌다. 세상이 우울할수록 정신과는 돈 많이 벌겠구나 생각을 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내담자들은 휴대폰을 들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유튜브를 보며 히죽거리거나 손가락을 두드리며 게임을 하거나.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메시지를 나눌 누군가가 있다면, 히죽거릴 여유가 있다면 여긴 왜 왔니. 짜증과 함께 공황장애가 올라오자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3시 예약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간호사는 세상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늘 초진 환자가 많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한 뒤 문을 거칠게 닫으며 내 심정을 전달했다. 맑은 겨울 하늘에 내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다시 정신과로 돌아와 진열된 아무 잡지나 뽑았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이목구비가 달린 것 외에는 나와는 교집합이 없는 모델들이 명품을 휘감고 괴기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다음 환자가 호명되며 진료실로 들어간다.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한다. 


“다음 차례시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알겠다 하며 다시 잡지로 눈을 돌렸다. 다음장을 넘기자 에디터가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인 화려한 말로 자신의 글재주를 뽐냈지만 나는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아니, 나만 다른 세상에 사는 건가.? 잡지를 신경질적으로 덮고 눈을 감았다. 앞의 환자는 할 말이 많은가 보다. 상담실 안에는 웃는 소리, 우는 소리, 가끔 훌쩍이는 소리와 그걸 장단 맞춰주는 정신과 선생의 사람 좋은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들의 대화는 15분을 넘어 계속된다. 


시발 수다 떨러 온 거야?     


 한 시간이 더 흘렀다. 드디어 간호사가 불렀다. 나는 상담실로 들어가며 문을 닫고 나오는 내담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지만 속이 다 후련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거면 심리상담소를 가던가 시장통에서 수다나 떨지 이 여자야하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분함에 이번에도 문에 다소 감정을 싣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미소 지으며 요즘 근황을 묻는 의사에게 나는 여기서 두 시간 반을 기다리며 괜찮았던 공황장애가 터졌다며 인사를 대신했다. 당신도 어지간히 힘들겠다.     




 내 상담은 10 분이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신경정신과가 심리상담소는 아님을 나는 아니까. 밖으로 나가며 다음부터는 예약시간을 잘 맞춰달라는 맺음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이 병원이 개원했을 때부터 다녔던 사람이고 무려 자살시도를 세 번이나 할 정도로 저 병아리 같은 수다쟁이 가짜 우울증 환자들과는 다르니 vip 대접을 해줘야 하며, 대신 나는 당신의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 테니 다음부터는 예약 따윈 하지 않고 찾아와 1순위로 진료를 받을 것이며, 이왕이면 더럽게 비싼 수면제도 의사 재량으로 좀 깎아 줄 것이며, 웬만하면 더럽게 느려터진 엘리베이터 수리도 좀 하고 대기실에는 차분한 음악 따위는 제발 꺼버리고 핸드폰은 절대 사용금지이며 병원 내에서 웃는 것 또한 금지할 것을 차마 요청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잡지는 불 싸지르라고도.

이전 09화 숟가락. 고집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