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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앙 Mar 15. 2024

풀려가는 밧줄처럼 옥죄는 것.

2020년 12월

그날 병원을 나서며 다짐했다. 주어진 '제2의 인생'은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다고. 


가족의 행복이 최우선순위로 올라갔다. 자기 철학과 꿈만 맹목적으로 좇은 결과는 너덜너덜해진 손목처럼 참담했고,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었으나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꿈과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서 그만 해방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한사코 마다했다만, 길바닥이 아니라 사람 사는 집에서 살고 남들처럼 '정상'의 범주 안에서 살아가라는 부탁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부모님 가슴에 대못박은 자식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살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끔 안부전화로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뿐이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 

조용히. 살았지만 죽은 듯이.

 

시간은 금세 흘러 2018년, 내 나이도 앞자리가 바뀌었다. 약속대로 20대를 바친 돈탈탈 털어 조그만 집을 하나 장만했다. 남은 돈으로 소형 SUV도 뽑았다. 나는 한국이 말하는 평균 또는 평균 조금 아래의 삶으로 적당히 안착했다.


서서히 우리 가족에겐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다시 웃음꽃도 피어났다. 나는 그 꽃을 지키고 싶었다.

잃을 것이 생기자 나의 행동,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것에서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꿈이 없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며 부르짖던 자유의 투사는

술과 우울증 그리고 죄책감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제는 안정감과 그것을 유지할 돈 그리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만하면 됐어. 오늘도 안 죽었잖아.'




'제2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님을...? 말이야 쉽지. 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지옥 같은 것도 없더라.


삶의 패턴을 바꾸자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자기 철학'이라는 든든한 나침판은 망가졌다. 그저 일끝내고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한바탕 울어야만 잠에 들 수 있었고, 그럴 때 듣기 위한 슬픈 노래를 모으는 이상한 취미가 생겼다. 그럴수록 내가 흘린 피를 어머니가 닦으며 흘리셨던 눈물의 빚을 갚으려면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말뚝처럼 깊어졌다. 나는 별도 뜨지 않는 사막에 갇힌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주변을 돌아봐도 똑같이 황량해서, 어디로 가야 할 줄 몰라 가만히 서있는 사람처럼. 나는 사는 낙이 사라진 살아있는 시체 그 자체였다. 그것은 정신적 자살이었다. 


배운 질이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그뿐이라, 끊임없이 영화는 찍었다. 조감독도 하고 미술팀도 하고 제작팀도 했지만, 더 이상 영화에 열정에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먹고살기 위한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 일이 없을 땐 일어나자마자 강박적으로 운동을 한 다음 샤워를 한 뒤 블라인드 내리고 술을 마시고 약을 먹고 다시 잤다. 심할 때는 일주일정도 연속된 날도 있었고, 영양실조 상태로 편의점까지 기어 간 적도 여러 번이다. 나는 이 짓거리를 '하루삭제'라고 불렀는데, 정신과 의사는 이 행동이 '간접자살'이라 말했다.


사람들과 술 한잔 하며 축 처진 기분을 달랠 때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서울에 집도 있고 차도 있는 놈이 우는 소릴 해댄다며 어떤 사람들은 나를 ‘죽지 못해 잘 사는 놈’이라,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 그만하라'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래, 그것도 참으로 맞는 말이지만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지.

 

'네가 던진 직구는 스트라이크가 아니야.' 

'당신은 왜 내 인생 중 고작 일부분을 보고 내 삶 전체를 난도질하는가.?'


나는 점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었다. 그것은 사회적 자살이었다. 





내 삶을 팽팽히 긴장시키던 무언가가 풀어지며 안락한 무언가가 내 삶을 옥죄기 시작했다.

진짜 우울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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