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우연히 너를 만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네게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너는 언젠가부터 나를 바다생물이라 불렀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2019년 어느 날이었다.
나를 놓고 산지도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를 열흘처럼 살다가 열흘을 하루처럼 쓰다 보니 시간은 잡아챌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고, 나 또한 굳이 시간을 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매일 밤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의 나는 속이 텅 빈 가방을 쇳덩이처럼 무겁게 짊어지고는 몇 칸 안 되는 계단을 몇 시간이고 힘겹게 올랐다. 꿈에서 깨면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고, 땀이 식으며 냉기가 온몸을 감싸 부르르 떨었다.
가끔은 미워하던 자들도 꿈에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었지만 내 팔은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고, 칼이 있어도 그게 세상 무거워 들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용케 팔을 휘두르면 주먹은 괜한 허공만 가르며 잠에서 깨는 것이었다.
그날도 어느 날처럼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직감하며 잠에서 깼다.
마침 쉬는 날이라 나는 '하루삭제'를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한 뒤, 술을 한잔 두 잔 마시며 이제는 지겨워진 어느 영화를 보다가 수면제를 털어 넣고 잠에 들었다.
역시나 꿈을 꿨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다리 아래로 따뜻한 무언가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파도인가?
꿈속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잔잔한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투명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오직 잔잔한 파도소리만이 흘렀다.
짧은 찰나였지만, 정신과 육체에 무한한 따스함을 느끼며 나는 꿈에서 깼다.
세상은 여전히 새벽이었다.
하지만 숙취대신, 기분 좋은 오묘함에 휩싸였다.
그것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작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 얕은 바다에서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구나.
그 꿈을 꾼 이후 거짓말처럼 우울증이 사라졌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술을 마셔도 잊지 못했고
피를 흘리면서도 씻지 못했던 아픔들이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버렸다.
햇수로만 10년 어쩌면 그 이상 나를 괴롭히던 이 지긋지긋한 질병은 사고의 전환으로 인해, 공황과 불안증세까지 데리고 마법처럼 사라졌다. 그땐 허무하다고 느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 날.
집 안에 있던 술을 몽땅 하수구에 쏟아버리며 나는 생각했다.
'아주 멋진 적수였다.'
코로나가 발병한 후, 영화일이 많이 줄었고 여행도 갈 수 없게 되자 이 기회에 나는 못다 한 대학 공부를 마치고 싶었다. 다만 영화가 아니라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우울증이야말로 내 전문 분야라고 생각했고 기회가 된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던 중, 책을 읽다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상담심리치료 기법 중 '통찰 insight'이란 내담자의 무식적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서 내담자가 이를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꿈 역시 일종의 통찰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좋은 것은 사랑하는 이가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얕은 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우연히 사랑하는 당신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 말이다.
나는 익숙해져 무심해졌던 왼팔에 새겨진 타투를 아주 오랜만에 인지했다.
'Amor Vincit Omnia'
시간이 지난 2024년 현재.
나는 오늘도 매일 아침 운동을 끝낸 뒤, 두 손을 모으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언제나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고 건강하길 기도합니다.
당신은 나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현재 이 순간 자유의지로 정신적 가치를 실현할 때 행복을 얻는다는 자기 철학을 지켜주시고
그 순간을 놓칠 때마다 그것을 되찾는 강인한 의지를 주소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그리고 영원히."
살아가며 또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이야기의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었고
20대의 나는 풀려가는 밧줄처럼 옥죄는 삶에서 죽음을 택했으며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희망으로 다시 살아났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지금, 눈매는 쳐졌을지 몰라도 눈빛은 여전하다고 느낀다.
이제 나는 내게 겪었던 시간이 '하지 않을 맹세처럼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나의 자기 철학과 함께.
"당신을 바다생물이라 부르는 까닭은.
너에게서 차가운 바다가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야.
어둡고 차가운 곳을 버텨낸 나의 바다생물. 나의 호앙이.
햇빛은 항상 있었고 단지 바다 겉면에만 얕게 닿았던 거야.
다른 생물들은 그 얕은 따뜻함에 취해있을 뿐 그 아래를 내려갈 용기가 없어.
그래서 난 깊은 저곳의 차가움과 어두움을 겪어본 나의 바다생물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하지 않을 맹세처럼 불길한 것> 연재를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