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5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시각.
나는 손목에 많은 피를 흘린 채, 저혈당성 쇼크로 구토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현장에 나가 영화를 잘 마무리 한 뒤 뒤풀이는 고사하고 밤 10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먼지투성이 몸을 씻으면서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화장실에 락스를 뿌려 솔질을 하고, 다음은 빨래를 했고 빨래를 기다리면서 방구석 여기저기를 물티슈로 닦았다. 그렇게 달밤의 청소를 끝내고 책상에 앉아 그것이 당연한 전개인 듯, 군더더기 없는 유서를 썼다.
그리고 술을 병째로 들이켠 뒤, 한 치의 오차 없이 동맥을 잘랐다. 피는 처음엔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몇 분이 지나자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피를 닦아내고 흐르는 피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양동이에 담았다.
뚜렷한 자살의 전조나 계기는 없었다.
집이 생기고, 등 따시고 배부르니 목표와 독기가 사라지고 번아웃이 온 것 같다.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꿈을 위해 달려가는 집시 영화인에서 알코올 중독자이자 우울증 환자 그리고 외톨이로 변했다.
언제부턴가 삶의 목표가 죽음이 되어버렸다. 우울증이 담배처럼 천천히 내 삶을 갉아먹다가 불현듯 존재감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10분.... 15분....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아늑해졌다. 하지만 의식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위스키는 눈물과 섞여 짜게 느껴졌고, 말보로는 그새 동이 났다.
이렇게나 오래 걸릴 일인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젊은 아버지 품에 안겨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탔던 2살 때의 삶의 첫 기억이 사진처럼 눈에 박혔다. 아버지는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며 놀라셨었다. 8살, 보이스카웃 옷을 입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예쁜 엄마 얼굴도 떠올랐다. 나만 아니었으면 그 미소 잃지 않으셨을 텐데. 초등학교 친구들과 야구를 하던 시절, 그땐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하루종일 뛰어도 힘이 남아돌았다. 영화관에서 <쥬라기 공원>을 처음 봤을 때 그 경이로움에 술 한잔, 망할 존 키팅에 감명받아 다짜고짜 영화를 한다며 엄마에게 소리 지르던 고등학교의 나를 떠올리며 담배 한 개비.
나는 남들이랑 똑같은 짓거리를 하면서 자기가 정상이라 믿는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친놈 소릴 듣더라고 내 자유의지, 자아의 선택으로 내 인생을 결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뭐야? 연남동 어느 원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잖아.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20살, 편의점에서 그 놈들 때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지금 즐겁게 영화를 하고 있을까?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니, 봤더라도 그렇구나 하고 엄마 말씀 들었더라면.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후회의 후회의 연속, 상처 위의 상처가 더러운 기억 위의 더러운 기억이 얹어졌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면 태어나는 것부터 문제였지.
그런데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넌 똑같이 했을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이게 네 운명인가 보지.
나는 남은 수면제를 몽땅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의식은 사라졌다.
다시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또 실패했구나.
오감이 서서히 감각을 되찾았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났다. 어느 솜씨 좋은 의사가 꿰매서 붕대를 감아놓은 오른손에는 알 수 없는 통증과 갑갑함이 느껴졌고, 링거가 꽂힌 왼팔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긴장되어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다가 왼손의 링거바늘을 뽑고는 주변 물걸들을 병실에 던져댔다.
누가 신고했냐고. 왜 나를 살렸냐고 마음속으로 소리 지르면서.
그 소란에 병실로 간호사들이 들어왔고 그 뒤로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엄마 얼굴을 보자 나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 눈길을 피하며 공황발작으로 다시 쓰러졌다. 쓰러지는 나를 안아주는 엄마를 보며 생각하며 다시 잠에 들었다.
'잘 살 거라고, 나는 행복할 거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돌아섰는데 이 꼴이나 보여서 미안해. 근데 엄마... 왜 이렇게 손에 주름이 많이 생겼어...'
병실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우리는 비로소 화해했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가슴에 대못을 박아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엄마도 그랬다.
속으로 다짐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당신은 나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입니다.
퇴원 후, 같이 살자는 부탁은 사양한 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새집처럼 말끔했다. 엄마가 왔다 갔구나... 여기 서기 흩어진 아들의 피를 닦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떠올리니 다시금 마음이 무너졌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그랬어야만 했다. 더 깊은 바닥을 치고 싶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의 후회는 있다. 왜냐하면 이 짓거리는 더럽게 아프거니와,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왜 나는 살아있는 거지. 정말인지 그 어느 때 보다도 죽음에 가까웠는데.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날 발신 목록에 119가 찍혀있었다.
수면제가 나의 에고를 재운 뒤, 이드를 깨운 것이다.
살려달라고 내가 신고했구나.
나는 그 형처럼 지하도의 왕이 될 수 없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흐르는 피를 바라보는 것보다,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죽음보다도 두려웠던 게 무엇인지.
그것은 그래도 한 번 살아볼 만하지 않냐는. 조그마한, 잘 보이지도 않는...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