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석 "공포의 세기", 문학과 지성,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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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의 갈취 행각, 그것이 소설의 시작이다. 밀레니엄이 끝나던 즈음 모비는 알바 임금을 떼인 가게를 찾아 ‘발골도’로 주인의 입 속에 꽂아 넣는다. 밀린 알바비 이상을 갈취하고 주인의 혀에 상처를 낸 후 유유히 가게를 빠져나온다. 다소 상투적이다. 그래도 뭔가 기대감을 갖게 한다. 백민석은 그 즈음에 등장했던 소설가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이제는 대작가로 올라선 김영하나 박민규보다 나는 백민석을, 특히 장편소설 “목화밭 엽기전"을 좋아했다. 그가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란다!
세월의 무게가 쌓인 것일까? 아니면 남한이라는 배경이 변한 탓일까? 소설의 중반까지의 흐름은 꽤나 기묘하다. 터질 듯 하지만 고요하고 고요한 듯 하지만 살벌하다. 어쩌면 언제나 끝을 보여주려는 백민석다움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듯도 싶었다. 경, 심, 령, 효, 수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공포의 왕’ 모비가 겪는 인생사의 토막이 번갈아 가며 묘사된다. 소설의 대략 절반까지 이렇게 흘러간다.
그런데 절반이 지나면서 소설은 갑자기 있는대로 페달을 밟는다. 작가의 의도였을까? 너무 밟아서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다. 인물들의 ‘ 결심’과 함께 불이 피어오르는 순간 소설은 빠져나오기 힘든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공포와 쾌감을 독자에게 안긴다. 속도는 현기증 나게 빠르지만, 역설적으로 그 속도 때문에 우리 사는 세상의 지옥도는 더 분명하게 눈앞에 드러난다.
“공포의 세기"는 어떤 (시대) 정신에 이끌린 연쇄 살인, 대량 살인 혹은 동시 살인의 이야기다.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개인적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들은 결국 “불의 혀”가 되어 세상의 일부를 불사르는 불꽃이 된다. 살인의 방법이나 동기가 꽤 다양하고 그럴 듯해서 이 단서들을 작가는 어디서 얻었을까, 싶다. 그래서 작가겠지만.
가속도가 붙은 중반 이후 중첩되는 영화는 지아장커의 “천주정"이다. “천주정”은 자본주의가 터잡은 중국의 풍경을 다루면서도 인물들의 모티브는 모두 전통의, 즉 오래된 중국에서 비롯된다는 역설을 다루고 있다. 이 충돌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 불의를 참지 못해, 좌절을 참지 못해, 그리고 그냥 싫어서 남을 찌르고 나를 죽인다. 이것이 비극 속 인물들이 지닌 숙명이다. “공포의 세기” 역시 “천주정”과 같은 리듬과 주파수를 송신하는 소설이다. 더이상 고속성장하지 않는 한국의 자본주의와 그 자본주의의 정신적 약물 노릇을 해왔던 하지만 이제는 지옥 풍경의 일부가 된 한국의 기독교를 일련의 살인들 속에서 몽롱하게 뒤섞는다.
나는 기능적인 캐릭터들을 싫어한다. 일테면, 이 대목에서 비밀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 등장하거나 죽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그런 설정들 말이다. 나에게 ‘기능적인’이라는 단어는 결코 캐릭터를 수식할 수 없다. 캐릭터는 소설가가 창조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물신’이다. 그의 외향과 성향을 창조하는 것은 작가겠지. 하지만 그의 의도와 내면을 들여다 보다는 것은 독자들이다. 어쨌든, 기능적인 캐릭터들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 소설이 마음이 든다. 등장인물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과 누군가를 죽이지만, 그 동기나 심리가 뭔가를 간단하게 대변하거나 상징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모티브가 진공에서 전개되는 순수악 같은 것도 아니다. “불의 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알 수 없고, 그래서 계속 머리 속을 빙빙 맴돈다.
현재 폭력 남친의 손아귀로 떨어져 버린 가정 성폭력의 희생자, 가정 폭력의 주체가 되버린 몰락하는 중산층 중년남, 가출팸을 갓 벗어난 20대 여자와 짝패를 이룬 폭력기계 남친, 같은 처지의 노숙자를 처단하는 동족살해 노숙자, 그리고 독으로 꼬이는 사람들을 해치우는 카페 주인, 그리고 ‘공포의 왕’ 모비는 이들과 보이지 않는 연대로 세상에 지옥불을 피어올린다. 이들의 전언이 “불의 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