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일을 만들어 간다는 건
갑자기 일이 몰아닥치면 에너지가 뚝 떨어진다. 가을을 타는 걸까. 해야 할 일은 점점 쌓여가고 벌여놓은 일들은 마감이 다가오는데 몸을 웅크리고 이불 속으로 숨고만 싶다.
숲으로 출근을 하지 않았더라면 방에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손바닥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을 거다. 예약해둔 필라테스 수업을 가볍게 넘겨버리고 에라 모르겠다 늦잠을 잤다. 간신히 잡아놓은 하루 패턴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시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느지막이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를 하고 세수를 했다. 마음 같아선 종일 꼼짝도 안 하고 싶지만, 출근은 해야 한다. 집에서 보내온 밑반찬으로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출근 준비를 한다. 레깅스를 입고 반팔티 위에 바람막이를 걸쳤다. 간단한 청소도구와 텀블러를 담은 백팩을 맨다. 왼손에 휴대폰과 이어폰, OK. 오른손에 열쇠, OK. 출근 준비 끝. 아차, 가스 밸브 확인! 진짜 OK!!
아파트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숲 근처까지 간다. 버스에 올라타 기사 아저씨 뒤 두 번째 좌석에 앉는다. 좋아하는 자리다. 가장 넓기도 하고 다리를 바퀴 턱에 올릴 수 있어서 좋다. 음악 앱을 켜고 고를 것도 없이 어제의 마지막 곡에 이어서 다음 곡을 재생시킨다. 지금부터 마음껏 멍 때리는 시간.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음악을 들으면 40분이 훌쩍 지난다. 숲까지는 근처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걸어서 15분이 걸린다. 몸과 마음이 무거우니 조금 더 힘주어 걸었다. 안 그러면 다리가 질질 끌려가고 말 테니까. 팔을 크게 크게 벌리고 의식적으로 힘차게 걸었다.
숲에 도착해서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쓰레기를 줍고, 작품 주변을 정돈하고, 책방을 정리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초록이들보다 나와 내 삶을 점검하는 게 우선이다. 몸은 일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어디 구석에 처박혀있는 나를 찾아 어르고 달래본다. 괜찮아, 지금은 쉬어가는 타임이니까. 마음껏 쉬고 나면 다시 움직이고 싶어질 거야.
퇴사 후 2년 차, 아직은 프리랜서라 말하는 것도, 식물 화가라 부르는 것도, 작가라 칭하는 것도 마냥 쑥스럽다. 프리랜서, 식물화가, 작가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 아니, 퇴사생이 알맞겠다. 퇴사 후 다시 삶을 꾸려가는 퇴사생. 오로지 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퇴사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업으로 삼는 길에 들어섰다. 아직 초반이지만 운 좋게도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공모전 수상도 하고, 전시도 하고, 클래스도 하고, 책도 내고. 감사하게도 짧은 기간에 내가 가진 역량 이상의 기회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역시나 기회는 마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나의 영역을 넓히고 기회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주어진 일은 곧잘 해내지만 스스로 일을 만드는 건 어렵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완벽한 세팅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다 보니 아예 시작 자체를 주저하게 된다. ‘일단 해보자, 안되면 말고!’가 잘 안된다. 과연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맞는 걸까? 오히려 직장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까?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내게 ‘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 아직은 그 마음이 크다. 돈이 우선이었다면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이어나갔을 거다. 하지만 내겐 회사 생활이 안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결국 나만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하고 싶은 일을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취미로만 남겨두는 것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삶의 만족도가 떨어질 때마다 매번 내가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해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아, 계속 그림을 그렸더라면’, ‘그때 미술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형편이 어려워도 입시 미술을 해봤더라면’ 자꾸만 지난 시간을 들추며 아쉬움과 미련을 쌓았다. 그 무게에 마음이 지쳐 나가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더 늦기 전에 해봐야겠다. 후회하더라도 하고 나서 해야겠다. 그렇게 시작됐다. ‘좋아하는 일을 우선으로 두기.’
그때 그 마음을 기억하며 숲을 걷는다. 숲으로 출근하게 된 것도 좋아하는 일을 지키기 위해서니까.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각오로 뛰어들었으니까. 자꾸만 머뭇거리는 ‘시작’에 원동력이 되어줄 첫 마음을 다시금 다잡아 본다.
눈앞에 곧고 단단하게 자리 잡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사시사철 푸르러 소나무라 했는데 숲의 소나무 중에는 아프고 병들어 있는 아이들이 몇 있다. 머리부터 솔잎이 메마르고 갈변이 시작되어 조금씩 밑으로 내려온다. 정원에 심겨 있다면 누군가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잘라내고 말았겠지만, 숲은 그 나무마저도 품는다. 각자의 에너지를 쓰러져가는 나무에게 나누어준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소나무는 다시 힘을 내본다. 기둥에 새순이 돋는다. 계절과 상관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싹을 틔우고 잎을 뻗는다. 곁에서 함께 버텨주는 이들이 있어 소나무는 든든하게 숲을 믿고 자란다. 내게도 나의 길을 응원해주는 든든한 벗들이 있다.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둔다고 통보했을 때 ‘왜?’라는 물음 대신 한 템포 쉬어가라며 토닥여준 부모님, 용기 있는 결정이라며 도전하는 미래를 응원해 준 동료들, 드디어 너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아간다며 고개를 끄덕여준 친구들. 의심으로 가득 찬 내게 믿음을 나누어준 사람들 덕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만의 일을 차근차근 만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