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일기>
요즘 스스로를 편집자라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 지금의 나, 그러니까 사별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 쓴 책들 정도만 읽어낸다. 그마저 화자에게 깊이 감응하지 못하고 편집자 마인드로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스스로가 싫어서 책을 금방 덮어버리기 일쑤고. 사내 3년 연속 리뷰왕 마인드는 어디로 사라졌나.
곁에 있을 때는 당연한 줄 알고 살다가 빈자리가 생긴 이후 상대가 얼마나 크고 밝은 빛이었는지 말하는 영원한 이별에 관한 책은, ‘세상에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내용을 글로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어미를 잃은 자식의 글, 자식을 잃은 어미의 글, 형제를 잃은 동생의 글 등을 찾아 읽었다. 이들은 왜 글을 썼을까. 희망을 잃은 사람은 써야 그나마 살아남는다는 증명일까.
잃은 자를 살린다는 측면에서 글을 쓴다면 충분히 응원할 만하지만, 이를 책으로 엮어낸다면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금껏 읽은 사별 관련 책은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글은 ‘짐승이 글을 쓴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날것 그대로라 거부감이 일었다. 어미를 잃은 자식의 글은 죽는 상대에게 애와 증을 동시에 느끼는 그를 부러워하다가, 또 이미 성인인 자식까지 있는 스스로를 ‘고아’라고 연민하는 그를 한심해하다가 한 권이 끝나버렸다. 형제를 잃은 슬픔에 대해 쓴 또 다른 에세이는, 수십 년 지나 남겨진 가족이 일상에서 서로 엉기는 글에 집중되어 있어서 지금의 나에게 유효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글을 읽고 싶어 자꾸만 헤매는가. 구술생애가 최현숙 작가의 《작별 일기》를 읽으면서 조금 분명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사건을 사회적 의미를 담아 들여다보는 눈을 기르고 싶었던 것 같다. 최현숙 작가는 늙은 여성이라는 개인의 “해체”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보증금 1억에 월세 200여만 원을 감당할 수 있어야 입소 가능한 실버타운 속 부유층 노인들과, 요양보호사로서 돌봄노동하며 지켜보았던 가난한 노인들의 갭 사이에서 일종의 현기증을 느낀다. 아비의 늙음과 어미의 죽음을 앞둔 자식으로서의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 예민함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기록해나가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3년여 동안 서서히 사그라지는 부모를 기록한 그의 글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증명한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글을 닮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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